오래전 뉴욕 현대미술관(모마)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을 본 적이 있습니다. '주유소'라는 작품이었지요.
별로 크기가 크지 않은 작품이었는데, 화집에서만 봤던 호퍼의 작품을 실제로 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강렬한 색감이었습니다. 어느 시골 마을 길가의 한적한 주유소에 어둠이 막 내려 앉기 시작하는 순간을 그린 작품은 사진으로만 보면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밝고 강렬한 색감을 지니고 있었죠. 그 강한 색감 때문에 더 고독하게 느껴졌던 듯합니다. 마치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속에서 한낮의 찬란한 태양빛을 받고 있는 아름다운 풍광이 더 공포스럽게 느껴지듯이 말입니다.
오스트리아 감독 구스타브 도이치의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원제는 'Shirley: Vision of Reality') '은 근래 본 영화들 중 실험적인 발상이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영화를 많이 보다 보면, 왠만해서는 신선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로튼토마토 식의 표현을 쓰자면 '신선도 100%'의 작품이었습니다. 에드워드 호퍼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왜 이렇게 개봉관 숫자가 적을까..하는 의구심도 영화를 보니 이해가 됐고요. 실험성이 강해서 , 솔직히 대중적이지는 않은 작품이더군요.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20세기 초중반 미국 리얼리즘 계열 화가인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 13편을 소재로
1930대, 1940년대, 1950년대, 1960년대 미국 사회와 셜리라는 여성의 삶을 하나로 녹여내고 있습니다.
대개 유명화가가 남긴 그림을 영화 소재로 삼을 때는 화가의 삶을 그려나가면서 해당 그림이 어떻게 그려지게 됐는지를 묘사하는 방식이 일반적인데 (예: 영화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도이치 감독은 그림 그 자체를 재연하면서 상상의 이야기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영화의 모든 장면은 호퍼 그림을 그대로 세트를 만든 다음 배우가 그 세트 안에서 극히 제한적인 동작만으로 셜리란 여성의 내면을 연기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있습니다. 그러니까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실사영화인 것이지요.
호퍼 그림의 색감은 물론이고 광선의 각도까지 완벽하게 재연해낸 장면들은 기가 막힐 정도로 정교합니다.
물론 호퍼 작품이 모두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셜리라는 한명의 여성의 삶을 연결할 수있는 작품 13점만 영화에 나오지요. 3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시대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 주인공 셜리는 그림 속의 여자가 그렇듯이 나이를 먹지 않습니다. 영화가 형식적으로는 셜리의 삶을 소재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 감독이 더 중점을 두는 것은 호퍼가 각 그림을 그렸을 당시의 미국 사회상( 예를 들어 한국전쟁, 매카시 공산주의자 색출 파문, 엘리아 카잔 감독의 배신, 케네디 당선, 킹 목사의 '나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 등등), 그리고 사회와 인간의 관계를 고찰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주인공 셜리는 ' 그룹 시어터'라는 극단에 소속된 배우입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셜리가 1931년 8월의 어느날 프랑스 파리의 한 작은 호텔에 있는 장면이 비춰집니다.
보이스오버로 들리는 대사로 추정해보면, 셜리는 지금 연극배우를 계속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합니다.
속옷 만 입고 침대에 앉아 공연 팸프렛을 뒤적이면서 , 셜리는 속 말을 합니다.
"여기서 일주일 있고, 나머지 일주일은 해변가에서 보낸 다음 돌아가야겠지. 가면 내가 잘 적응할 수있을까"
셜리가 호텔방에 앉거나 누워서 고민하는 장면은 호퍼의 <호텔방>을 그대로 재연한 것입니다.

<영화(위)와 호퍼의 그림 '호텔방(1931)'. 셜리의 적갈색 머리칼 위에 떨어지는 조명등의 불빛, 초록색 의자의 그림자 각도 등을 비교해보십시오. >
셜리는 대공황기에 극단 일자리가 없어지자 신문사 광고부에 취직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영화관 안내원으로 일하기도 하지요. 연극만큼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 지금의 일도 셜리는 감수할 수있습니다. 언젠가는 다시 연극무대로 돌아갈 수있다는 희망이 있기때문이죠.
사무실 장면('밤의 사무실') 에서 셜리는 속으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메소드 연기를 해봐선지,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도 연기하는 것같아.나중에 연기할때 지금 경험이 도움이 되겠지? "

<영화 장면(위)과 호퍼 그림 '룸 인 뉴욕(1932)'. 영화 속에서 셜리는 피아노 앞에 앉아있고, 애인 스티브는 밖에 나갔다 돌아와 신문을 읽습니다. 셜리는 신문기자인 스티브가 일하러 나갔다 왔다고 했지만, 사실은 일자리를 잃었고 빵배급을 받고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요. 그를 떠날 것인가 말 것인가 셜리는 속으로 고민합니다.>

<영화 장면(위)과 호퍼 그림 ' 뉴욕 무비(1939)' .
이 장면에서 셜리는 극단을 나와 밥벌이로 영화관 안내원 일을 하는데 머리칼도 금발로 염색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감독은 그림에는 없는 영화 스크린을 조금 더 많이 보여주는데 영화에 대한 호퍼의 애정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일까요... 이 그림이 그려졌을 당시 누아르 영화들을 찾아보니, 험프리 보가트 주연,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1937년작 '데드 엔드'의 한장면이네요.^^. 보가트의 억양이 워낙 특이해서, 이 장면을 보는 동안에도 정확한 영화 제목은 알 수없지만 보가트가 나오는 누아르 영화인 것은 금방 눈치를 채겠더군요.>
셜리는 뉴욕을 떠나 케이프코드 해변가 집에서 지내기도 하고, 신문사 사진기자인 애인 스티브와의 관계를 고민하기도 하며, 매카시 청문회에 나가 연극계 동료들을 배신하는 증언을 한 엘리아 카잔에 분노하고,
킹 목사의 연설을 라디오로 들으며 공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1960년대 어느날 셜리는 기차에 앉아 어디론가 갑니다.
무릎에는 '에밀리 디킨슨'전기 책이 놓여있습니다.
다시 셜리가 이야기합니다.
"그래, 다시 시작하는거야. 그룹시어터와 함께 공연하면서 로마에도 가는거야"

<영화 장면(위)과 호퍼 그림 '체어 카(Chair Car.1965년)'.
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각도, 빨간 속 옷을 입은 여자가 셜리를 바라보는 시선의 각도 등이 정교하게 일치합니다>
감독은 시대변화 속에서 강인하게 살아가는 여성을 그려보고 싶었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습니다. 30년대부터 60년대를 살아가는 셜리는 분명 그 시대 미국의 전통적인 여성상은 아니지요. 자기 일에 대한 확고한 소신과 정열이 있고, 사회이슈에도 아주 민감합니다. 밥벌이를 하는 순간에도 "나중에 연기에 도움이 될거야"라고 생각할 정도이지요.
감독은 호퍼를 영화 소재로 택한 이유로 첫번째 , 호퍼 그림이 보여주는 프레임이나 광선 등이 필름누아르 등 영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 흥미로왔고, 두번째는 리얼리스트 화가로서 단순히 있는 그대로 그림을 그리는게 아니라 마치 삶의 한 순간을 무대 위에 구현하는 듯한 스타일에 끌렸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셜리의 모든 것'은 단순히 영화라기보다는 , 13개의 막으로 나뉘어진 연극같은 느낌이지요.

<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의 세트장과 영화의 장면. 그리고 그림 >

이 영화에서 비주얼과 대사 이외에 흥미로운 또하나의 요소는 바로 사운드입니다.
감독은 각 장면마다 , 다양한 사운드를 창조해냅니다.
단순히 음악을 들려주는게 아니라 자동차 소음, 갈매기가 지저귀는 소리, 기차소리, 비바람이 부는 소리, 라디오로 들리는 킹 목사의 연설 소리 등을 들려주는 것이지요.
무언의 그림을 보고, 이런 사운드를 만들어낸 감독의 뛰어난 상상력에 감탄하게 됩니다.
거의 정지화면에 가까운 연기를 해낸 여주인공 역의 스테파니 커밍의 연기도 뛰어납니다.
원래 댄서 출신으로 실험적인 몇몇 영화에 출연한 적도 있다고 하는데,
역시 춤을 추던 사람이어선지 우아한 동작이 돋보입니다.
현대미술 이야기 no. 12 -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현대미술 이야기 no. 12 -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사회의 리얼리티를 담은 20세기의 구상화 입체파를 선두로 한 추상미술이 미술계를 장악하고 있을 무렵, 한편에서는 이러한 추상미술의 유행을 거부하는 화가들이 있었다. 추상미술의 대척점에 선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많은 화가들은 동시대의 삶을 반영하는 전통적인 미술양식을 선호하며 사실주의, 즉 구상회화의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의 사실주의는 시대착오적인 구상회화가 아닌 현시대를 반영한 나름의 독창적이고 다양한 양식으로 전개되었다. 사실적인 도시의 풍경으로 산업화와 그로인한 인간의 심리적 긴장을 표현하거나, 전원의 풍경화나 실내를 묘사하여 향수를 불러일으킨 사실주의 화풍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부흥기를 맞이하였고,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7.22-1967.5.15)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과 같은 작품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도시 속 고립된 존재의 초상 에드워드 호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1942, 캔버스에 유채, 76*152cm,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몇몇의 사람들이 짙은 어둠이 내리깔린 도시에서 홀로 불을 환하게 밝힌 카페에 둘러앉아있다. 전면이 유리로 된 카페의 창문을 통해 카페 형광등의 푸른빛이 길가로 쏟아지고 있지만, 그로인해 카페는 더욱더 고립되어 보인다. 카페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어두운 도시에서 빠져나온 고독한 사람들. 시선을 붙잡는 붉은색 드레스차림의 여성은 다른 남성들의 존재감을 더욱 상실시키고, 이들은 함께 있는 듯 보이지만 서로 교류하지 못한 채 제각각 동떨어져 있다. 호퍼의 대표작인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은 산업화로 만들어진 현대의 도시 속에서 고독해진 인간의 존재를 대변하는 작품이다. 호퍼의 스승이자 애쉬캔 화파(Ashcan schoo, 20세기 초두 뉴욕에서 활약한 8인조 화가그룹으로 에이트(The Eight)가 정식 명칭이다.)의 리더였던 로버트 헨리(Robert Henri)는 ‘도시와 도시생활을 있는 그대로 그릴 것’을 요구했는데, 실제로 애쉬캔 화파는 아카데미즘에서 벗어나 도시의 어두운 부분까지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미국화가로서 미국인의 삶을 해석하고자 했던 첫 번째 시도로 평가받는 애쉬캔파의 활동을 이어받은 호퍼는 평면적이고 내향적인 회화방식으로 소외된 도시인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그림의 배경은 주로 호텔방이나 극장휴게실, 아파트, 주유소, 야간의 술집 등 미국의 일반적인 도시 풍경이며 등장인물은 혼자 또는 함께 소통하지 않는 소수의 사람들이다.
에드워드 호퍼, <주유소>, 1940, 캔버스에 유채, 66.7*102.2cm, 뉴욕 현대미술관
? 에드워드 호퍼, <호텔방>, 1931, 캔버스에 유채, 152.4*165.7cm, 마드리드 티센-보르네미자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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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퍼의 사실적인 작품들은 단순히 일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가려진 심리적 요소, 그 내부를 응시하게 해준다. 호퍼의 작품에 등장하는 홀로 고독한 사람, 또는 군중 속에서 조차 고립되어 있는 사람의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이것은 비단 당시 미국의 도시인뿐만이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며, 그 쓸쓸함과 상실감이 고스란히 전이됨을 느낄 수 있다.
에드워드 호퍼, <자동판매기 식당>, 1927, 캔버스에 유채, 71.5*91.5cm, 아이오와 드모인 아트센터
? 에드워드 호퍼, <브루클린의 방>, 1932, 캔버스에 유채, 74*86cm, 보스턴 미술관
현대인으로 살아가며 겪는 인간의 외로움과 고독의 정서가 깊게 배어있는 호퍼의 작품은 당시 미국 도시민들의 삶을 가장 미국적인 장면으로 그려냈다는 평가와 함께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1950년 이후 등장한 추상표현주의가 미국의 화단을 장악하면서 호퍼의 사실주의 작품들은 점점 인기를 잃어가게 된다. 하지만 호퍼는 그가 사망한 1960년대 중반까지 자신의 화풍을 흔들림 없이 이어나갔다. 1960년대 추상표현주의가 쇠퇴하고 팝아트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자 호퍼의 작품들은 다시금 재조명을 받게 되는데, 20세기 미국인의 삶의 단면을 반추한 그의 사실적인 작품들이 대중 문화적 시각이미지를 미술로 수용한 팝아트와 슈퍼리얼리즘에 영향을 미친 선구자로 평가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셜리에 관한 모든 것’ 2013년 개봉한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여주인공 셜리의 이야기가 에드워드 호퍼의 13점의 그림을 토대로 진행된다. 말 그대로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을 ‘영화화 한’ 작품이다.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총 13개의 에피소드가 존재하는데, 하나의 에피소드는 호퍼의 그림한 장에서 구성되며, 하나의 에피소드가 끝나고 다음 막으로 이동 할 때는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미국의 1930년부터 1960년까지의 굵직한 사회적 사건들인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 인종차별과 시민운동 등이 셜리의 라디오를 통해서 내레이션 된다. 호퍼의 작품이 산업화와 제 1차 세계대전, 경제 대공황을 겪은 미국인들의 모습을 포착했다고 평가받는 점이 <셜리에 관한 모든 것>에 영화적으로 복제된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싶다. 어찌 되었든 영화 속 공간은 그림과 실제가 뒤섞이면서 호퍼의 작품을 기가 막히게 재현해 낸다.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의 감독인 구스타브 도이치감독이 만들어낸 정교한 ‘타블로 비방(tableau vivant, 실제 사람이 정지된 모습으로 분장하여 그림이나 역사적 장면을 연출하는 것)’은 완전히 음소거 된 호퍼의 작품에서 시작되고 이동 없이 결말을 맺는다. 실제로 호퍼는 그의 스승인 사실주의 화가 로버트 헨리로부터 “영화가 어떻게 이미지를 시간과 공간의 관점에서 틀을 끼워 넣는지를 눈여겨보라”라는 가르침을 받았고 호퍼는 이점을 충실하게 연구했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호퍼의 작품에서 들어나는 계산된 듯한 ‘연극적 요소’는 호퍼가 ‘가장 영화적 구성의 작가’로 불리 우는 이유이다. 현대인의 삶의 단면을 무심하고 무표정한 방식으로 포착하여 공간과 인간의 어우러짐을 개성적인 빛과 분위기로 연출한 호퍼의 작품들은 앤드루 와이어스(Andrew Wyeth), 에릭 피슬 (Eric Fischl)를 포함한 현대작가들 뿐 아니라 알프레드 히치콕 (Alfred Hitchcock)등 영화감독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