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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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의 또다른 진품 ? 아일워스 모나리자 미스터리
너무나 유명한 미술작품 모나리자는 미술을 몰라도 잘 그려진 작품 같기는 합니다. 그런데 미술에는 거의 문외함인 저로서는 모나리자의 전체적인 명암이 너무 어둡다는 생각과 함께 모나리자의 모습이 뭔가 건강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더군요. 그런데, 모나리자의 또다른 진품이라는 아일워스 모나리자(Isleworth Mona Lisa)는 저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더군요. 많은 전문가가 레오나르도다빈치의 작품이 맞다고 검증한 바 있어 내용을 이미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소개해봅니다.
아일워스 모라니자는 영국의 미술감정수집가인 휴브레이커(Hugh Blaker)에 의하여 런던의 서쪽인 아일워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루브르의 모나리자와 아일워스모나리자를 같은 위치에 두고 비교해보면 아일워스 모나리자가 더 절어보이지만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는 그대로 닮았습니다. 누가 모자리자를 따라서 그린 것인지 아니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또 하나의 모나리자를 탄생시킨 것 일까요 ?
모나리자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죠. 아시다시피 레오나르도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가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한 시점은 1503년에서 1506년 사이로 추정됩니다. 1494년 유명한 메디치가가 피렌체에서 일시 축출됩니다. 그리고 시민에 의한 피렌체공화국이 수립되죠. 1503년 마키아벨리 등 10인위원회로 꾸려져 있던 피렌체공화국은 피렌체에 2명의 거장을 부르게 되죠. 지금은 시청사로 사용되고 있는 팔라초 베키오(Palazzo Vecchio)의 대회의실을 벽화로 장식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 당시의 권력은 피에로솔데리니에게 가 있었죠. 그는 두 사람에게 피렌체를 빛낼 벽화를 그려달라고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앙기아리전투The Battle of Anghiari)를 미켈란젤로는 카스키나전투(the Battle of cascina)를 선택합니다. 모나리자는 말을 타고 서로 부딪히는 장면을 미켈란젤로는 전투에 참여하기 전 목욕하는 그렸습니다. 알려진 대로 둘 다 그림을 완성하지는 못합니다. 이후 다빈치의 작품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의 스카나갈로의 전투(The Battle of Scannagallo)가 들어섭니다.
그리고 바사리의 그림에 사라진 앙기이라전투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남겨놓은게 2013년에 발견됩니다. 그 당시의 정치상황으로 다빈치의 작품을 지우고 그림을 그려달라 했으나 바사리는 다빈치의 작품을 후대에 전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바사리는 벽을 하나 더 세워 자신의 그림을 그리고 의 작품 뒤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을 보존해 두었던 겁니다.
스키나갈로의 전투 장면에서 산등성이 쪽에 군인들이 깃발을 들고 가는데 거기에 보면 CERCA TROVA라는 글이 적혀있죠. 이태리어로 번역하면 "구하라 그럼 찾을 것이다."라는 뜻 입니다. 바사리는 다빈치와 24년의 차이가 나는 미켈란젤로의 제자이긴 했지만 같은 작가로써 다빈치의 작품이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했고 후세에 사람들이 그림을 찾아 나설 것이라는 것을 알았던 겁니다.
이야기가 잠시 다른 곳으로 흘렀습니다만 다빈치는 앙기아리 전투를 그릴 당시 모나리자도 의뢰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모나리자는 그 당시 피렌체의 실크 거상 프란체스코 델 지오콘도(Francesco del Giocondo)의 부탁을 받고 그의 아내 리자게르라르디니(Lisa Gherardini ; 1479-1542)를 모델로 그린 것으로 확신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궁급하지 않으십니까 ? 루브르의 모나리자와 아일워스의 모나리자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게 맞다면 어느게 먼저 그린 걸까요 ? 미스터리를 쫒아 가봐야 겠습니다.
아일워스 모나리자와 루브르 모나리자를 반으로 쪼개 겹쳐놓으면 또 하나의 신비한 그림이 탄생합니다. 그 속에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는 생생히 살아있습니다. 어느 것을 먼저 그렸는지 알아보기에 2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아일워스 모나리자의 캔버스를 탄소연대 측정을 해 본 결과 1410년에서 1455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나왔는데요. 모나리자에 대해 어느정도 아시는 분은 다빈치가 1503년 이후 피렌체에 머무는 동안 앙기아리전투도 완성하지 못하고 모나리자도 완성하지 못하고 2년 쯤 지나 피렌체를 떠난 것으로 알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모나리자는 1519년 그가 즉을 때까디 갖고 다닌 것으로 역사는 얘기합니다, 끝까지 미완성으로 남은 거죠. 그리고 1519년 다빈치가 사망하자 그가 사랑했던 제자 살라이(Salai)가 보관했다가 지금의 루브르까지 간 것으로 말합니다.
여기에 첫번째 단서가 있습니다. 다빈치는 모나리자를 그리는 댓가로 선불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나리자를 1503년부터 계산하면 그가 사망하는 1519년까지 16년 정도의 기간 동안 완성을 못했다는게 이상합니다. 분명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면 독촉이 있었을테니 말입니다. 또한 아일워스 모나리자는 다빈치가 피렌체를 방문한 1503년 기준으로 보면 실제 나이일 24살의 모나리자 젊은 모습과 거의 흡사합니다. 그에 반해 루브르의 모나리자는 24살의 모습치고는 너무 나이가 들어보입니다. 루브르의 모나리자를 처음부터 그린 것이라면 저렇게 나이가 든 모습으로 그릴 수 있을까요. 다빈치는 아일워스 모나리자를 완성작으로 만들어주고 또다른 모나리자를 그리다가 계속 가지고 다닌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이 드는 부분입니디. 두번째는 미술게의 이름을 남긴 바사리(1511~1574) 의 언급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레오나르도는 모나리자를 완성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4년 뒤에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그림 속 모나리자는 장미빛과 진주빛의 색조를 갖고 있었다. 눈은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광택을 띠고 있었고 아름다운 콧날은 장미빛으로 부드러웠다." 아무래도 이 설명에 부합한 모나리자는 아일워스 모나리자인 것 같습니다. 혹시 다빈치는 아일워스 모나리자를 그려주고 모나리자를 흠모한 나머지 또 하나의 모나리자를 시간을 두고 그린 것은 아닐까요?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 배경은 그녀의 아름다운 고향인 투스카니지방을 배경으로 합니다. 상상 속에 그녀와 배경을 그리다 보니 덧칠이 더욱 많아지고 지금의 멋진 작품으로 남은 것은 아닐까요 ? 루브릐 모나리자는 원숙한 매력을 품고 모나리자의 또 다른 진품 아일워스 모나리자는 젊은 그 미소가 더욱 매혹적으로 느껴집니다.
모나리자 위작 미스터리 |
모나리자 분실사건과 13장 이상의 위작 [보러가기] |
다빈치의 제자가 그린 프라도(Prado) 모나리자
모나리자가 좀 더 젊어진 것 같은 이 그림은 프라도(Prado) 모나리자 입니다. 모나리자는 수많은 위작 논란과 더불어 실제 다빈치의 전작 모나리자라고 여겨지는 아일워스 모나리자까지 이야기 거리가 많은 작품입니다. 그만큼 가히 최고의 미술 명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라도 모나리자는 스페인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어 프라도 모나리자라고 불립니다.
프라도 모노리자를 루브르 모나리자와 같이 세워두면 전체적인 구도가 꼭 같습니다. 특유의 신비한 미소는 부족하게 표현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외에는 젊은 피부톤과 모나리자의 고향인 투스카나의 풍경이 아주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프라도 모나리자는 수없이 많은 이미테이션, 즉 위작은 아님니다. 위작을 만들려면 전체적인 명암과 대비가 혼돈될 만큼 비슷해야 하지만 프라도 모나리자는 한 눈에도 위작은 아니다고 느껴집니다. 카피본이라고 합니다. 연대측정 결과 다빈치가 살았던 시대의 작품은 진작 밝혀져 있었습니다.
최초의 프라도 모나리자는 바탕이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습니다. 프라도 모나리자는 스페인의 왕실 아트컬렉션에 수세기동안 보관되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1819년 프라도미술관이 마드리드에 개관되자 이 곳으로 옮겨져 왔습니다. 검은 칠 뒤에 다른 배경이 있을지는 몰랐습니다. 그러다, 도믄 걸작은 스케치나 카피본이 있던 당시의 미슬세계를 생갇해 본다면 프라도 모나리자는 다빈치의 제자가 다빈치의 옆에서 다빈치가 그려나가는 순간순간에 다라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그렇다면 검은색 칠 밑에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죠. 사실, 루브르박물관은 2010년 모나리자의 뒷 배경을 포함한 전체의 윤곽을 조사할 계획을 세웠지만 루브르 모나리자는 원체 유명해서 흐린 배경을 조사할 방법이 있긴 하지만 모나리자를 옮겨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1911년 모나리자도난사건 처럼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그럴 형편은 못 되었습니다. 프라도 모나리자 카피본이 모나리자가 그려졌을 당시 옆에서 동시작업된 것으로 알고있어 프라도미술관 측에 빌려달라는 요청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에 착안한 프라도미술관 측은 자체적으로 검은색으로 칠해진 배경에 대한 과학적 조사에 나섭니다. 엑스레이 조사 및 적회선 복사술, 고화질의 디지털 작업 등 모든 현대적 기법을 다 동원하여 작업에 들어갑니다.
그리하여 2012년 프라도 모나리자의 뒷 배경이 아주 멋진 모습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모나리자의 그로 인하여 비록 카피본이긴 하지만 모나리자의 아름다움은 멋진 배경과 조화되어 더욱 대비되는 풍경으로 살아납니다.
루브르 모나리자와 프라도 모나리자를 어설프게나마 합쳐보면 이런 모습이 나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작업할 당시 옆에서 따라그렸던 제자의 눈으로 본 모나리자는 최초에 이랬을 겁니다 다빈치의 제자가 그린 프라도
모나리자는 만일 루브르 모나리자가 모나리자 초기작품인 아일워스 모나리자의 장미같은 색조를 유지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이 됩니다. 모나리자는
왜 그리 덧칠이 많이 되었던 것인지 참 미스터리 인긴 입니다. 모나리자의 모델로 알려진 리자게르라르디니 (Lisa Gherardini ;
1479-1542)로 추정되는 유골이 2012년 피렌체의 한 수도원 근처에서 발견된 바 있습니다만 모나리자의 아름다움은 캔버스 속에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모나리자의 최초본 이야기 |
아일워스 모나리자 미스터리 [보러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