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미술 이야기 (책)

『명품의 탄생』

알래스카 Ⅱ 2016. 2. 15. 20:42





명품의 탄생2009.07 / 이광표 지음





서울대학교에서 고고미술사학을, 같은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공부한 뒤 동아일보 문화재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문화재의 매력에 빠져서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했으며 지금은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과 박사과정에 다니고 있다.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문화재의 매력을 알릴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손 안의 박물관』, 『살아 있는 역사 문화재』,『한 권으로 보는 그림 문화재 백과』, 『국보 이야기』, 『옛 그림 속에 숨은 문화유산 찾기 』, 『한국 미술의 미』, 『명품의 탄생-한국의 컬렉션 한국의 컬렉터』등이 있다.





책을 내면서·왜 컬렉션인가

제1부 컬렉션이란 무엇인가


컬렉션, 그 낭만적인 수집욕
컬렉션의 문화적 의미

제2부 컬렉션의 시작


한국의 컬렉션, 첫 발을 딛다
안평대군, 「몽유도원도」를 낳다
낭선군, 컬렉션의 새로운 전기

제3부 컬렉션과 조선 후기 문화르네상스


18∼19세기 조선의 수집 열기
미술시장이 만들어지다
전문 컬렉터의 출현
김광수, 컬렉터로서의 자의식
이병연, 정선 진경산수화의 후원자
김광국, 국경을 넘나든 조선 최고의 컬렉터
오경석, 근대로 나아간 컬렉터
고람 전기, 창작에서 거래까지
컬렉션과 조선 후기 문화르네상스

제4부 컬렉션과 민족문화의 수호


일제의 문화재 약탈과 경매
이왕가박물관과 총독부박물관 컬렉션 .




이왕가 박물관


1909년 창경궁 명정전 일원에 식물원, 동물원과 함께 박물관이 설립되어 11월 1일부터 일반에 공개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이왕가박물관으로 개칭되었으며 1938년 이왕가미술관으로 바뀌었다가 해방 뒤에는 덕수궁미술관으로 존속하다가 1969년에 국립박물관에 소장품이 통합되었다.


1907년순종이 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하게 되자, 순종을 위무한다는 목적으로 창경궁에 식물원, 동물원과 함께 이왕직에서 설립을 추진하였다. 처음에는 황제의 관람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1909년 11월 1일 일반 공개 이후 대중의 교육과 관람에 이바지하고자 하였다.


삼국시대 불상, 고려시대 청자, 조선시대의 도자와 회화 등 고대 미술품을 주로 구입을 통하여 수집하였다. 1909년 11월 1일 일반에게 공개하여 공공 박물관이 되었다. 개관 당시에는 창경궁의 명정전, 통명전, 양화당 등 전통 목조 전각 7채를 전시실로 사용하다가 1911년에 창경궁의 자경전 자리에 일본식 벽돌 건물을 건축하여 본관으로 삼았다. 1912년에 처음 『이왕가박물관 소장품 사진첩』(상ㆍ하 2권)을 발간하였으며, 667점의 유물 사진을 수록하였다. 이때 소장품 현황은 12,230점에 이르렀다. 1918년에 상ㆍ중ㆍ하 3책으로 개정 증보한 재판을 발행하였으며, 1929년부터 1933년까지 다시 도자기, 불상, 회화로 나누어 각 책을 증보 간행하였다. 1930년대에는 『고구려 고분벽화집』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입장료 ??원을 받았으며, 일본의 교토 박람회, 다이쇼 박람회 등에 소장품을 출품하기도 하였다.

직제상 관장은 없었으며 쓰에마츠 구마히코(末松雄彦)가 사무관으로 근무하면서, 강진의 청자가마를 답사하기도 하였으나 학문적인 연구기관은 아니었다. 1938년 소장품 가운데 미술품을 덕수궁으로 옮겨가면서 이왕가미술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황실에서 설립하고 운영하였으며 명품을 중심으로 불상, 도자, 회화 등을 수집함으로써 공공 박물관으로서 기능하였다. 국보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 청자상감 포도동자문 표주박모양 주전자 등이 이때 수집되었다. 그러나 설립과정이 주체적이었다기보다는 일본인들에 의해 주도되어 일본인들이 평가하는 유물들이 주로 수집된 측면이 없지 않다. 한편 다른 박물관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조선시대 회화 컬렉션 등 현재 국립박물관 소장품 가운데 명품이 이 시기의 수집품이 많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설립된 박물관으로서 의의가 있다. 황실에서 설립되었으나 추진 세력이 일본인들이었으며 처음에는 순종황제의 위무를 목적으로 내세웠던 만큼, 대한제국기에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적 성격이 다소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일반에 공개되어 공공 박물관으로서 기여하였으며, 산일되기 쉬운 불상, 도자, 조선시대 회화작품 등 우리나라의 중요한 미술품을 소장, 전시하여 미술문화의 이해에 이바지하였다.



조선총독부 박물관


1915년 경복궁에서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였을 때에 미술관 건물을 지어 조선고미술품을 전시하였으며, 조선물산공진회가 끝나자 이를 그대로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조선총독부 학무국 산하 기관이었으며, 박물관협의회와 조선고적조사위원회를 설립하여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운영하였다. 1926년에는 경주분관이, 1939년에는 부여분관이 설립되어, 고대 수도에도 유물을 전시하도록 하였다. 직접적인 산하기관은 아니었지만 1931년에 개성에 설립된 개성부립박물관과 1933년평양에 개설된 평양부립박물관, 1940년공주읍에 설치된 공주읍박물관도 조선총독부 박물관과 일정한 연계를 맺고 있었다.

경성의 조선총독부 박물관에는 6개의 전시실을 두어 낙랑 및 대방군,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불교미술품 등을 전시하였다. 이는 식민사관에 의해 조선역사를 재편하여 유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추진된 조선고적조사의 중심 기관이었으며, 조사된 유적은 조선총독부박물관에 전시되었다. 1921년경주에서 이루어진 천마총 발굴과 1926년의 서봉총 발굴은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주도하여 이루어졌다. 평양의 고구려 고분 및 낙랑고분은 조선총독부 박물관 촉탁이었던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등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중심으로 유물 유적이 조사되었으며 이는 조선의 역사를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재편하는 데에 이용되었다. 1938년에는 ‘내선일체’의 기획전시를 개최하여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데에도 쓰였다.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에 접수되고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국립박물관이 됨에 따라 조선총독부박물관 및 산하 지방분관, 부립박물관 소장품은 현재 국립박물관의 주요 소장품이 되었다.


조선총독부가 근대적인 문화기관을 설립함으로써 조선을 근대화시켰다고 자칭하는 한편, 조선의 유적과 유물을 일제의 식민사관에 따라 전시함으로써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데에 이용하였다. 결과적으로는 조선총독부박물관 소장품이 해방 이후 국립박물관으로 이관됨에 따라 파괴되어 가던 역사유물과 미술품이 보존될 수 있었다.





오타니의 중앙아시아 컬렉션
오구라의 한국 문화재 컬렉션
컬렉션, 민족문화를 지키다
오세창, 근대 컬렉션의 큰 산
전형필, 한국미술사를 완성하다
손재형, 「세한도」를 찾아오다
박영철, 연암을 흠모하다
오봉빈, 전시회 시대를 연 컬렉터

제5부 컬렉션의 현대화


6?25와 한국 컬렉션의 위기
컬렉션의 진화
이병철, 한국 컬렉션의 새로운 도약
윤장섭, 도자기에 빠지다
한광호, 대영박물관에서 탕카를

제6부 컬렉션의 기증


위대한 결정, 컬렉션의 기증
박병래, 백자를 닮은 컬렉터
이홍근, 개성 상인의 혼
이회림, 미술관까지 통째로 내놓다
김용두, 몸은 못 돌아가도 문화재는 고향에
이병창, 우리 도자기로 일본을 감동시키다
송성문, 가장 많은 국보를 내놓은 『성문종합영어』의 저자
유창종과 이우치 가문의 기와 인연
후지쓰카 부자, 그 끝없는 추사 사랑

제7부 컬렉션과 경매


컬렉션과 한국의 경매
한국 경매의 현주소


"역사적으로 검증받은 3원3재(단원, 혜원, 오원, 겸재, 관아재, 현재)의 그림값이 천경자 그림의 10분의 1에도 미치치지 못하다니......"  "그것이 시장의 논리인데 어쩌란 말인가. 수요공금에 의해 가격과 거래 물량이 정해지는 법인데 이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건 적절치 못하다."


컬렉션 가이드

미주
참고문헌



박수근 「빨래터」- 45억 2천만원 (2007)


김환기 「꽃과 항아리」 - 30억 5천만원 (2007)


박수근 「시장사람들」 - 25억원 (2007)


박수근 「농악」 - 20억원 (2007)


백자철화 「구름용무늬 항아리」 - 16억 2천만원 (2006)


이우환 「선으로부터」 - 16억원 (2007)


이중섭 「새와 애들」 - 15억원 (2008)


박수근 「목련」 - 15억원 (2007)


김환기 「항아리」 - 12억 5천만원 (2007)


박수근 「노상의 사람들」 - 12억원 (2007)


청자상감 매화 새 대나무 무늬 매병 - 10억 9천만원 (2004)


박수근 「노상」 - 10억 4천만원 (2006)


김환기 「15-ⅩⅡ 72 #305 New York」 - 10억 1천만원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