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핀〈자포로지에의 카자크들> & 톨스토이『카자흐 사람들』
체첸은 캅카스 산맥 주위의 유전지대입니다.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지요. 체첸 사태의 폭격지 중 가장 유명한 곳이「톨스토이 유르트」입니다. 체첸 사람들이 톨스토이를 존경하여 그의 이름을 붙인 마을이예요. 체첸의 스타로글라돕스카야에 톨스토이 박물관이 있고, 체첸 잉구슈 국립대학의 이름에 '톨스토이 기념'이라는 칭호가 붙는 걸 보면 그들이 톨스토이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소설 『카자흐 사람들』은 체첸을 배경으로 쓴 작품이데요, 체첸에 대한 톨스토이와 러시아의 입장은 톨스토이의 소설 제목인 『신의 일과 악마의 일』 각각에 해당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톨스토이 100주기였던 2010년까지도 러시아는 여전히 톨스토이의 반전론과 비폭력론을 조롱하는 체첸 토벌작전을 벌인 '어둔의 나라'이자 '악마의 나라'였으니, 맨정신으로는 톨스토이를 기념할 수 없겠지요.
일각에서는 작가 톨스토이의 고향을 야스나야 폴랴나가 아니라 캅카스라고 주장하기도 해요. 즉 체첸 공화국의 수도 그로즈니 부근의 카자흐 마을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톨스토이가 그곳에서 최초의 작품들인 자전적 3부작 『유년시절』 『소년시절』 『청년시절』을 비롯하여 『지주의 아침』일부와 『크리스마스의 밤』 등을 썼고, 『습격 - 어느 지원병 이야기』 『강등병 - 캅카스의 추억』, 그리고 『카자흐 사람들』의 소재 역시 그곳에서 얻었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가 캅카스에 오지 않았더라면 이 같은 작품들의 문학적 영감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므로 캅카스야말로 문학적 고향이라고 주장하는데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이는 톨스토이가 『참회』 이후에도 『캅카스의 포로』, 그리고 『하지 무라트』를 썼고, 특히 1910년 죽기 직전 가출하여 가고자 했던 곳이 체첸 부근 북오세티야의 주도인 '우라지캅카스'였다는점을 감안 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톨스토이는 카자흐 사람들의 자유로운 삶에서, 문명의 허위에 물들지 않은 삶에서 농민들끼리 살아가는 삶의 모델을 봅니다. 이것은 전 인류의 삶을 개혁할 만한 새로운 가능성이었겠지요. 결국 그는 『카자흐 사람들』을 발표할 무렵 고향에서 다시 시작한 교육을 통해 그 가능성을 실천에 옮깁니다.
(글. 박홍규, 『내 친구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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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군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낡은 총을 벽에서 꺼내 들고 총알 서너 발을 지갑에 넣은 뒤 침입하는 이단자에게 맞서려고 달려가는 개미와 같은 무지몽매한 촌무지렁이들. 그들은 러시아군이 계속 진군해오며, 자신들이 일구어왔고 앞으로도 밟고 살게 될 땅과 러시아군이 태우게 될 초가집, 그리고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들이 공포에 떨며 숨어 있을 계곡을 향해 계속 다가올 때, 자신들의 행복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을 빼앗기게 되리라는 점을 직감한다. 하지만 어찌해볼 수 없는 분노와 좌절감으로 눈물이 누더기 옷을 타고 흐를 때, 그들은 총을 땅에 던져버리고 양털로 짠 모자를 눈까지 내려쓰고는 죽음의 노래를 부르며 단지 단도만을 손에 쥔 채 러시아군의 총검에 머리를 들이민다. 바로 이런 사람에게 자위적 본능 의식과 거기서 비롯한 정당성이 주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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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이 가득 찬 끝없는 하늘 아래, 이처럼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답답함을 느낀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단 말인가? 과연 이처럼 매혹적인 자연 속에서 인간들이 자신의 영혼 속에 악한 마음과 복수심을 품고, 자신과 똑간은 인간을 살해하려는 열정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 누가 이걸 레핀 작품이라고 넣어 놨던데, 아닌 것 같은데?
Troups of Kornilov outside Petrograd in August 1917
군인들(Soldiers)
"인간은 뒈지고 나면 무덤 위에 풀이 자랄 뿐이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 톨스토이,『카자흐 사람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