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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발산초등학교 밀반출 미수 문화재

알래스카 Ⅱ 2015. 7. 22. 11:52

 

 

 

[헤럴드경제(군산)=이윤미 기자]  

 

전북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 45-1. 큰 길가에서 500여미터 들어선 발산초등학교는 반듯한 연미색 건물과 양지바른 운동장, 병설유치원까지 여느 초등학교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건강한 아이가 꿈꾸는 발산초등학교’라는 푯말도 일상의 풍경을 더할 뿐이다. 운동장과 초등학교 건물을 옆으로 비끼며 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그닥 기대는 하지 않았다. 살짝 올라 앉은 병설유치원에 다다라서야 일본인 지주 시마타니가 왜 이곳에 집을 지었는지 고개가 끄덕여졌다.

햇볕 가득 펼쳐진 너른 벌판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 시마타니는 대저택을 짓고 이 땅을 수탈해갔다. 유치원 옆, 평평한 소나무 숲에는 마치 유물 박물관인듯 석물들이 한 곳에 무더기로 모여있다. 이 중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은 석등은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원래 완주군 고선면 삼기리 봉림사터에 있던 게 엉뚱하게 이곳에 와 있다. 원통형 기둥에는 구름 속에서 요동치는 힘찬 용의 모습이 조각돼 있는데 이런 형태는 국내에 유일하다. 신라탑의 양식을 계승한 간결미를 보여주는 고려 5층석탑과 어느 집 묘를 지켰을 양의 석물 등 다양한 유물들은 제짝이 아니지만 그렇게 90여년을 함께 해왔다. 

 

이 곳은 1920, 30년대 군산의 5대 부호로 꼽힌 도곡농장주 시마타니 야소야의 옆 뜰이다. 병설유치원 자리에 시마타니는 거대한 저택을 지었다. 시마타니 저택의 규모는 현재 군산시 근대문화거리에서 가장 인기있는 히로쓰 저택의 5배에 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대저택이 해방과 함께 흔적없이 사라지고 석물 일부와 금고만 남아있다.
시마타니는 우리 문화재 수집에 열광했다. 안목이 뛰어났던 그는 문화재들을 불법으로 끌어모아 자신의 뜰을 장식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석물로 정원을 꾸미며 손님을 초대해 자랑하는 게 일종의 부자들 취향이었다.

병설유치원 뒤로는 시마타니가 수집한 골동품을 보관한 시마타니 금고가 당당하게 서 있다. 시마타니 가옥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로 1920년대에 지은 3층 규모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2005년 국가등록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된 시마타니금고의 입구에는 미국에서 들여온 파랑색 철제 금고문이 단단하게 달려 있어 견고함을 자랑한다. 창문은 이중 잠금 장치로 단속했다. 이런 보안장치로 6.25전쟁 상황에서는 인민군 본부로 사용돼 우익인사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 건물은 독특한 건축형태로도 유명하다. 빗물과 햇빛가리개 역할을 한 부섭창과 대리석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운 콘크리트 벽은 건축가들의 연구대상이기도 하다. 내부는 너른 마룻바닥으로 1층에 이어 다락방처럼 2층이 이어졌고, 판지를 열면 지하로 연결되는 구조다. 사마타니는 이곳에 현금과 서류 외에, 서화, 그림, 도자기 등 골동품 등을 보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골동품들이 아까워 이 땅에 남아 있으려 했지만 눈물을 머금고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전라도 미곡과 수산이 모이는 군산은 1899년 5월1일 개항과 함께 외국인 거주지가 해안가를 따라 형성됐지만 일본강점이 시작된 이후에는 일본의 철저한 수탈로 피폐해져 갔다. 일본인 부호들은 대부분 대량으로 땅을 사들인 뒤 간척 사업을 통해 농장을 만들고 도조를 올리는 수법으로 농민을 수탈해 부를 쌓아올렸다. 땅에서 쫒겨난 소작농들은 도시로 몰려와 달동네를 형성했고 여성들은 정미공장의 노동자로 전락했다.

시마타니를 비롯, 미야자키, 구마모토, 모리기쿠, 히로쓰 등 일명 일제 군산 5대 부호들이 쌓은 부는 이런 수탈의 결과였다. 각 농장의 미곡장에 모아진 쌀은 우마차로 군산항으로 이동했다. 일본군 군량미로, 일본인 식량으로 실어나를 쌀가마니가 군산 미곡창에 가득했다. 현재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앞에는 당시 밀물과 썰물에 구애받지 않고 24시간 쌀가마니를 실어나를 수 있도록 특수 고안된 뜬다리가 여전히 작동중이다. 밀물이 들어오면 다리전체가 떠 마치 육교처럼 쌀을 실어나를 수 있도록 만들어진 특허 다리다. 

 

 

 

 

 

 

 

 

 

일본으로 반출하려다가  갑자기 8. 15 해방을 만나서

미처 가져가지 못한 우리 문화재 석물(石物)입니다.

발산초등학교, 학교 뒷담에 붙어 있습니다.

석등(石燈) 하나와 5층석탑은 보물로 지정돼 있고, 다른 石物들도 다 예뻐요.

폐사지(廢寺址)에서 가져왔다고는 써 있는데,

(무덤에서 훔쳐온 것도 있어 보이고)

아닌게 아니라 정원석으로 놓으면 기막히게 좋겠더군요.

특히 석등 같은 건 누구라도 욕심낼 만하게 생겼습니다.

이런 식으로 일본에 넘어간 문화재가 엄청날 거예요.

일본에, 웬만큼 산다 하는 집이면 이런 석등 한 둘씩 있게 생겼어요.


주인(?)인 시마타니가 재산이 아까워서인지 한국으로 귀화 신청을 하였다는데,

당시 상황으론 받아들일 수가 없었죠.

美軍政이 거부했답니다.

 

 

 

 

 

 

 

 

 

 

 

 

 

 

 

 

 

 

 

 

 

 

 

 

 

 

 

 

 

  

 

 

 

 

 


 

 

 

  

 

 

 

 

 

 

 

 

 

거리낌 없이 가져가는 걸 멀건히 쳐다보고나 있었을 것이고.

운반도 한국사람이 품삯 받고 했을 것이고. 

솔직히 톡 까놓고 말하면,

‘약탈 문화재’ 라는 표현이 과할런지도.......

버린 것 주워간다는 식으로 죄의식이 없었을런지도.......

 

 

 

 

p.s


아! 그런데 그걸 몰랐습니다!

옆에 병설 유치원이 있는데, 그 뒤에 어마어마하게 큰 금고가 있었다네요.

나중에 다시 가봐야겠습니다.  ㅠㅠㅠㅠ

 

병설유치원 뒤로는 시마타니가 수집한 골동품을 보관한 시마타니 금고가 당당하게 서 있다. 시마타니 가옥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로 1920년대에 지은 3층 규모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2005년 국가등록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된 시마타니금고의 입구에는 미국에서 들여온 파랑색 철제 금고문이 단단하게 달려 있어 견고함을 자랑한다. 창문은 이중 잠금 장치로 단속했다. 이런 보안장치로 6.25전쟁 상황에서는 인민군 본부로 사용돼 우익인사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쓰이기도 했다.

 

 

 

 

 

 

 

사진을 친구 스마트폰으로 찍은 건데, 괜찮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