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8. 19:45ㆍ詩.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은 생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일에 대한 시인의 통찰을 담고 있다.
밥물은 대강 부어요/ 쌀 위에 국자가 잠길락말락/… (중략) …//
시인이 말하는 ‘서른다섯이 지나 계산이 맞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무슨 뜻일까.
“‘밥을 지으며’는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더라는 것을 깨닫고 쓴 시입니다.
머리로 읽었던 문장을 가슴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 의미가 폭발적 힘을 발하며 다가온다.
어머니 통해 알게 된 삶의 이면, 아름답고 찬란해
시인은 치매 앓는 어머니를 돌보고 있다.
“눈앞에 놓인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게 힘들고, 벅차고, 피곤하던 때가 있었어요.
날것의 자신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는 시인은 사랑 앞에서도 솔직하다.
“사랑만큼 좋은 게 있던가요?
시집에 실린 작품들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어느 것 하나 그에게서 나오지 않은 시가 없다.
“저는 그저 하고 싶은 말을 시에 썼을 뿐인데, 그것이 사람들이 듣고 싶었던 얘기가 아닐까 해요.
여섯 권의 시집과 두 권의 소설, 에세이까지 펴낸 ‘중견 작가’이지만
“1990년대 한국 문단은 남성 중심 권력관계가 강하게 작동하던 시기였죠. 지금도 다르지 않고요.
30대 시인은 어느 날 문단 행사가 있어 술자리에 참석했다.
“지난해 3월 한 공기업에서 예정되어 있던 시 관련 강의가 갑자기 취소됐어요.
시인은 우리도 일상의 소소한 것을 주목하면 ‘작은 시’를 남길 수 있다고 말한다.
“살면서 겪게 되는 숱한 삶의 면면을 종이에 쭉 적어보세요.
다음 계획을 묻자 “당분간 출판사 일에 전념하려 한다”면서도
문득 시집에 실린 시 ‘바위로 계란 깨기’ 한 구절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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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26.
“길이 보이지 않아도
나는 다만 이 햇살 아래
오래 서 있고 싶다”
시인 최영미가 6년 만에 신작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을 출간했다.
새롭고 뜨거운 언어로 문단을 넘어 한국사회에 충격을 주었던 첫 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이후
20여 년이 지나 최영미 시인은 또다시 변화의 중심에 섰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자신의 안과 밖에서 진행된 변화를,
밥과 사랑과 세상을 더욱 원숙해진 언어와 강렬한 이미지로 표현해냈다.
목차
1부. 꽃들이 먼저 알아
밥을 지으며 / 꽃들이 먼저 알아 / 마지막 여름 장미 / 헛되이 벽을 때린 손바닥 /
오래된 / 내버려둬 / 마법의 시간 / 문명의 시작 / 수건을 접으며
2부. 지리멸렬한 고통
예정에 없던 음주 / 등단 소감 / 괴물 / Mendelssohn violin concerto E minor /
지리멸렬한 고통 / 거룩한 문학 / 바위로 계란 깨기 / 독이 묻은 종이 /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 여성의 이름으로 / 2019년 새해 소망
3부. 다시 오지 않는
봄날 / 꽃샘추위 / 너를 보내며 / 죽음은 연습할 수 없다 / 시골 장례식 /
깊은 곳을 본 사람 / 지하철 유감 /비틀 쥬스 / 간병일기 / 주소록을 정리하며 /
행복, 치매 환자의 / 옆 침대 /뭘 해도 그 생각 / 낙원
4부. 심심한 날
짧은 생각 / 런던의 동쪽 / 소설, 후기 / 꿈의 창문 / 데이비드 호크니 /
50대 / 원고 청탁 / 카페 가는 길 / 사업자등록 / 연휴의 끝 / 쓰는 인류 /
오사카 성 / 여행 / 1월의 공원
시인의 말
발문: 다시 대낮의 햇살 아래- 최명자
책 속으로
아름다움이 썩는 냄새를 맡은 적 있니?
향기가 진할수록 서러운 거야
-「오래된」부분
위로받고 싶을 때만
누군가를 찾아가,
위로하는 척했다
-「예정에 없던 음주」전문
내가 아는 똥은 더럽지 않다
― 「간병일기」부분
누구를 가슴속에서 완전히 지우고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 기술을 아는 우리는
-「쓰는 인류」부분
출판사서평
쉬운 듯 심오하고, 애잔하면서 통쾌한 언어!
슬픔과 아이러니가 천둥 번개처럼 지나가는 생의 찬가
최영미 시인의 6번째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이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에서도 그 특유의 섬세하면서도 대담한 표현들,
지금 이곳에서의 삶을 직시하는 신선한 리얼리즘이 빛을 발한다.
내 앞에 앉은 일곱 남녀 가운데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지 않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나는 이 스마트한 문명을 용서해줄 수 있다
- 「지하철 유감」부분
어머니를 간병하는 지리한 일상에서 건져 올린 시「수건을 접으며」는
평범한 언어가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시인의 능력을 보여준다.
엉망인 세상을 내 손으로 정리할 순 없지만
수건은 내 맘대로 접을 수 있지
[……]
내 손을 거치면 어떤 모양의 옷이든
작은 사각형이 되지요
세상과 맞설
투쟁의지를 불태우며 수건을 접는다
매일 아침 깨끗한 속옷을 입을 수 있다면
누구든 상대해주마
- 「수건을 접으며」부분
찌르고 어루만지며 깊은 곳을 건드리는 이번 시집에는「괴물」을 비롯해 미투와 관련된 시가 5편 정도 포함되었다.
내가 아끼는 원목가구를 더럽힌다는 게 분했지만,
서랍장 위에 원고와 피고 5를 내려놓고
싸움이 시작되었으니
밥부터 먹어야겠다.
-「독이 묻은 종이」부분
보석처럼 빛나지는 않지만,
너희들은 서로의 가슴에 별이 되거라
-「여성의 이름으로」부분
인간의 조건에 대한 통찰이 풍자로, 세련된 농담으로 혹은 서정으로 변주되는
다채로운 세계는 독자들에게 강렬한 정서적 반응을 일으킨다.
2006년 이수문학상 심사위원이던 유종호교수는 “최영미 시집은 한국사회의 위선과 허위, 안일의 급소를 예리하게 찌르며
다시 한번 시대의 양심으로서 시인의 존재이유를 구현한다”라고 수상이유를 밝힌 바 있다.
“우리는 최영미의 시에서 관습과 예의를 따지는 체제에 정면으로 맞서는, 위험스런 모험을 느끼게 된다.
그녀의 스타일은 바로 그녀의 독립성이다”
- 제임스 킴브렐 (James Kimbrell)
한편 시인은 생활의 기쁨과 슬픔이 녹아든 서정의 세계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의 시는 단 한번도 감상만으로 끝난 적이 없다.
유치해지지 못해
충분히 유치해지지 못해
너를 잡지 못했지
-「마법의 시간」부분
그의 모던한 시풍 때문에 간과하기 쉽지만, 한국 전통시의 운율을 현대에 되살린 노래 같은 시어들은 김소월을 연상시킨다.
사랑을 떠나보내고 시인은 노래를 얻었다.
“가슴을 두드렸던 그 순간은 다시 오지 않았다.
다시 오지 않는 것들,
되살...릴 길 없는 시간들을 되살리려는 노력에서 문자 예술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어느 봄날, 봉긋 올라온 목련송이를 보며 추억이 피어나고 노래가 나를 찾아왔다.
사랑을 떠올릴 수 있는 동안은 시를 영영 잃지 않을 게다.”
- 「시인의 말」에서
마법의 시간
사랑의 말은 유치할수록 좋다
유치할수록 진실에 가깝다
기다려찌
어서와찌
만져줘찌
뜨거워찌
행복해찌
유치해지지 못해
충분히 유치해지지 못해
너를 잡지 못했지
너밖에 없찌,
그 말을못해 너를 보내고
바디버터를 덕지덕지 바른다
너와 내가 함께 했던
마법의 시간으로 돌아가고파
망고와 파파야 즙을 머리에 바르고
올리브오일로 마사지하고
싱그러운 페퍼민트와 장미꽃 향으로
중년의 냄새를 덮고
어미의 병실에서 묻은 기저귀 냄새도 지우고
기다려찌
너밖에 없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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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건을 접으며
엉망인 세상을 내 손으로 정리할 순 없지만
수건은 내 맘대로 접을 수 있지
수납장과 서랍의 질서를 나는 사랑하지
일요일 오후에 빨래 걷기를 잊지 않으면
인생이 순항할 듯,
일주일을 견딜 속옷을 접는다
내 손을 거치면 어떤 모양의 옷이든 작은 사각형이 되지요
세상과 맞설
투쟁의지를 불태우며 수건을 접는다
매일 아침 깨끗한 속옷을 입을 수 있다면
누구든 상대해주마
빨래 접기가 귀찮아지면
미련 없이 떠나야겠지
내게 더러움만 보여준 땅.
흐린 하늘, 최루탄과 미세먼지에 유린당한 눈.
너무 맑은 날에는 눈물이 났지
한 번뿐이었던 화창한 봄날,
그에게 배운 대로 세로로 수건을 말아
수납장에 세워둔다 포개진 기억들.
벌써 이십 년 전인데
너는 내게 영원히 젊은 남자
(엄마에게 그를 보여주진 않았지)
그와 헤어진 뒤, 하얀색만 입었지
내 헐렁한 팬티를 그는 싫어했지
할머니 같다고 놀렸지
나는 흰색
엄마는 누런색
건조대에서 흰색을 골라내느라
누런 수건을, 어머니를 방바닥에 떨어뜨렸다
미안해 엄마.
엄마는 이제 수건을 접지 않는다
혼자 머리를 감지도 못한다
내가 당신을 씻겨줄 토요일만 기다리는 엄마
토요일이 너무 빨리 다가온다고 투덜대는 나
어머니의 누렇게 바랜 내의를
비닐봉지에 넣기 전에 냄새를 맡는다
아무도 해치지 않고
사나운 고기를 싸는 상추 잎처럼
순하게 살아온 당신
날이 갈수록 작아지는 엄마
드럼세탁기도 없애지 못한 죽음의 냄새
엄마 수건과 내 수건이 섞이는 게 싫어,
위생관념이 철저했던 어미가 물려준 결벽증 때문에
어미의 세균을 1회용 비닐에 밀봉하고
돌아서, 터지는 소리
시리아를 공습한 미사일의 섬광처럼
어둠을 찢으며
가슴이 갈라지며
오래 벼르던 언어가 폭발한다
엉망진창인 세상을 정리할 순 없지만
쉼표와 마침표의 질서를 나는 사랑하지
등단 소감
내가 정말 시인이 되었단 말인가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멀쩡한 종이를 더럽혀야 하는데
내가 정말 시인이 되었단 말인가
신문 월평 스크랩하며
비평가 한마디에 죽고 사는
내가 정말 썩을 시인이 되었단 말인가
아무것도 안 해도 뭔가 하는 중인
건달 면허증을 땄단 말인가
내가 정말 여,여류시인이 되었단 말인가
술만 들면 개가 되는 인간들 앞에서
밥이 되었다, 꽃이 되었다.
고, 고급 거시기라도 되었단 말인가
괴 물
— 최영미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이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 <황해문화> 2017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