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사진으로 퓰리처 수상자, 케빈 카터의 죽음.

2017. 11. 2. 18:39미술/사진·조각·건축

 

 

 

 

 

케빈 카터의 사진 이야기 ((펌))

 

[http://paulagortazar.blogspot.kr/]

 

인사이트Kevin Carter / (소녀가 죽기만을 기다리는 독수리)

 

 

 
 
 
케빈 카터 Kevin Carter
 

 

수단 남부에 들어간 카터가 아요드의 식량센터로 가는 도중에 우연히 마주친 것은 굶주림으로 힘이 다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 뒤로 소녀가 쓰러지면 쓰러진 소녀를 먹이감으로 삼으려는 살찐 독수리가 소녀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셔터를 누른 후 그는 바로 독수리를 내 쫓고 소녀를 구해주었다.

이 사진은 발표와 동시에 전세계의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1994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후 일부에서 촬영보다
먼저 소녀를 도왔어야 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케빈 카터는 수상후 3개월 뒤 1994년 7월 28일에 친구와 가족 앞으로 쓴 편지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3살의 젊은 나이에......

 

 

 

 

퓰리처상의 피쳐사진 부문에서 상을 받게 된 이 사진을 찍은 것은 1993년이다.

케빈 카터는 일하고 있던 매체에 휴가를 내고 항공료를 빌려 당시 기아가 극심했던 수단으로 향했다.

아요드란 곳에 비행기가 도착하자마자 기아로 인한 희생자를 찍기 시작했다.

굶어서 죽음에 이르게 된 수많은 사람들에게 구조의 손길이 미치길 갈망하며 넓은 숲으로 이동했다.

 

그는 한 소녀가 급식센터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그가 사진을 찍으려고 쭈그리고 앉을 때 독수리 한 마리가 내려앉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독수리가 날개짓을 하게 되면 더 완성도가 높은 그림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한동안 기다렸다.

이윽고 독수리가 아무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독수리는 살아있는 생물체를 공격하지 않는다)

셔터를 누르고 독수리를 쫓아냈다.

그 어린 소녀는 다시 급식센터로 향하는 어려운 발걸음을 이었다.

 

케빈 카터는 나무 아래에 주저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하느님~”하고 중얼거리면서 울기 시작했다.

그의 수단 취재 여행에 동행했던 동료 실바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그후 계속 침통해져있었고 딸을 보고 싶다 면서 계속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 사진은 수단의 사진을 찾던 뉴욕타임즈로 보내졌고 1993년 3월 26일자에 실렸다.

그리고 전세계에 사진이 전파되는데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 사진이 아프리카의 참상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된 것도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후 그는 유명해 졌지만 일하던 매체를 그만두고 경제적으론 불안하기 짝이 없는 프리랜서 생황을 시작했다.

일을 하고 싶은 욕심때문이었다.
이듬해 4월 12일에 퓰리처상을 받는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

 

4월 18일 그를 포함한 Bang Bang Club의 동료들은 요하네스버그에서 10 마일 떨어진 토코자 마을로 향했다.

폭력사태의 발발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정오가 되기 직전 좋은 사진을 찍기엔 햇빛이 너무 강렬해 카터는 시내로 돌아왔는데, 그 순간 라디오에서 동료

켄 오스터브록이 살해당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또 다른 동료 마리노비치는 중상이란 소식도 함께.

케빈 카터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 다음날 폭력사태가 더 격화되었음에도 다시 토코자에 뛰어 들었다.

훗날 그는 “켄이 아니라 내가 총알을 맞았어야 했다”라고 술회했다.

퓰리쳐상을 받으면서 그는 많은 비난의 목소리도 접해야 했다.

케빈 카터 자신도 자주 고통스럽게 보도사진가의 딜렘마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는 시각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나는 피로 붉게 물든 주검을 프레임에 꽉 채우기 위해 줌인을 하기도 한다.

죽은 자의 얼굴은 약간 회색빛이 돈다. 나는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다.

마음 내면의 세계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일을 할 시간이며 나머지 일은 (사진을 찍은) 다음에 처리해야 한다고 되뇌이곤 했다.

내가 이 일을 할 자신이 없으면 사진기자란 직업을 관두어야 한다.”


현역 최고의 보도사진가 중 한 명인 제임스 나치웨이는 카터의 이야기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자신의 기분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런 일을 하는 사진기자는 아무도 없다. 그 일은 계속하기가 아주 어려운 직업이다”

그해 7월 27일 케빈 카터는 자동차 배기가스에 호스를 연결해 둔채 차안에서 자살했다.

수많은 참상을 지켜본 카터는 남아공에선 흔하기 짝이 없는 마리화나를 자주 피웠고,

친구 켄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말년에는 마약에 기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세상을 뜨면서 악몽과 불길함 따위로 범벅이 된 유서를 남겼다.


“절망적이다. 전화가 끊어졌다..... 집세도 없고...양육비... 빚갚을 돈...돈!!이 없다...

나는 살육과 시체들과 분노와 고통에 쫓기고 있다. 굶주리거나 상처를 입은 아이들,

권총을 마구 쏘는 미친 사람, 경찰, 살인자, 처형자의 환상을 본다,”

 

그리고 이 말도 남겼다.
“내가 운이 좋다면 켄의 곁으로 가고 싶다.”

 

 

 


 

 


2월 2일치 중앙일보의 ‘생각뉴스’ ─


"중앙일보의 기자는 “서울중앙지법이 최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족이 제기한 영화,

- ‘그때 그사람들’ 상영금지 가처분신청 사건에서

 

'굶주린 수단 소녀'(1994년)라는 작품(사진)을 찍었던 케빈 카터의 사례를 들며 일부 장면을 삭제토록 했다.”면서

시 형식의 에세이 기사를 실었다.
기사에서 “사진보다 사람 목숨이 우선이었어야 한다는 비난이 고통스러웠던지 예술가는 상처받고 죽어갔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의 태도를 가져야 표현의 자유도 확보된다. 그것을 몰라 불행했던 예술가를 잊지 마라” 라며

법관이 영화에 대한 부분 삭제 판결을 했다는 은유를 하고 있다. "


여러 가지로 기가 막혔다.

케빈 카터는 생전 듣도 보도 못했을 ‘그때 그사람들’이란 영화 때문에  대한민국의 한 기자에 의해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의 태도를 가지지 못한 ‘예술가’”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법원의 판결문 원문을 구해보았다. (위의 인용문 참조)

 케빈 카터는 대한민국의 한 판결문에서 역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의 태도를 견지하지 못한 ‘작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과연 위의 기사와 판결문에 등장한 케빈 카터의 사례는 사실(Fact)인가?

케빈 카터는 휴머니즘에 입각해 사명감을 가지고 현장에서 몸을 사리지 않았던 보도사진가였다.

인간에 대한 애정은 누구보다도 더 강했다.
“모든 분쟁지역 사진가들은 그들의 동료들이 다른 현장에서 부닥치는 것보다
훨씬 심한 윤리적 걸림돌과 직면한다.

전쟁사진은 다른 보도사진 분야보다 본질적으로 비참한 장면을 담게 되어 있다.

게다가 매시간, 매일 열악한 상황에서 판단을 내려야 하고

스트레스와 공포가 아드레날린과 짬뽕이 되어 어떤 사진을 마감해야하는 지에 대해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미국의 보도사진가 피터 호위의 말이다.

종군(혹은 분쟁지역전문)사진기자들은 평화와 인간의 존엄성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전쟁의 참상을 취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죽음과 마주치는 일이다.

인간의 죽음 앞에서 전쟁과 전쟁으로 촉발된 일련의 참상에 대한 회의를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끼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왜 반전단체에 직접 뛰어들어 집회에 참여하거나

기아 돕기 운동을 하는 자원봉사 활동가가 되지는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보도사진기자들의 임무는 따로 있고 그 임무 또한 숭고하고 지난한 것이다.


한국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하다 현재 미국에서 포토저널리즘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김영수씨는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사진기자의 윤리에 관한 한 독자의 질문을 받고 케빈 카터의 사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진기자.. Kevin Carter 라는 사진기자의 문제에 대해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제가 가장 관심있게 고민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구요...

그의 죽음에 관한 스터디도 하고 그의 사진과 그 상황에 대해 많은 사람들과 인터뷰도 하고 했습니다.

현재로서 제가 느끼는 부분은

그 현장에서 그 어린소녀를 구하지 않은 데 대한 스스로의 자책감이 그럴 죽음으로 몰아 넣은 게 아니라

그 사진이 주는 의미와 그가 겪어야 했던 인간으로서의 슬픔을 이해하기보다는

단지 명성이나 돈을 위해 그 상황을 이용한 추악한 인간으로 내몬 무책임한 비평가들과 세상에 대한 분노이고

좌절이라고 믿습니다.
그때 그가 사진을 찍지 않고 그냥 그 소녀를 구하기만 했다면

그 현장에서 그렇게 굶어 죽어가는 수많은 어린아이들의 그 비참한 현실을

그냥 안락한 집에 앉아서 자신들의 편안함만을 추구 하는 많은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며.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수많은 노력들을 이끌어 내지도 못했을 겝니다.”

그의 사진은 휴머니즘의 표출에서 해석해야 한다.

그는 사진을 통해 부나 자신의 명예를 추구하려고 했던 사람도 아니었고 작가나 예술가는 더욱 아니었다.

그가 괴로워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인간관계등 개인사 (친한 친구의 사망, 가정불화,등)에 기인한 것이다.

그 소녀 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굶주리고 병든 자들을 위한 고민도 당연히 했다.

그러나 그 소녀를 잘 먹이지 못한 죄책감이 아니라 비극의 원인인 전쟁의 참혹함 때문에 괴로워 한 것이다.

보도사진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 분쟁지역(종군)의 사진기자가 어떤 고민을 하는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한 인간의 존엄성을 그렇게 간단한 필설로 훼손시켜도 되는 것일까?


 

 

 

 

Vulture stalked white piped lie forever
Wasted your life in black and white

 

 

- Kevin Carter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