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8. 26. 10:52ㆍ미술/서양화
크림트가 탁월한 아이디어로 화려하게 장식적인 그림이나 그린사람으로 알기가 쉬운데
전혀 아니올시다,올시다.
뎃생이며, 채색이며, 구도며,를 보면..... 진짜 헉소리 나옵니다.
나 같은 건 백 번을 죽었다 다시 태어난대도 어림 없겠시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워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베트벤의 9번 교향곡
( 구스타프 클림트 작품 중 베토벤 프리즈와 관련)
Gustav Klimt
1862.7.14 ~ 1918.2.6
※ 풀 스크린으로 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
구스타프 클림트는 오스트리아의 화가로써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작품을 그린 사람 중 한 명으로써 <kiss> 라는 작품을 만들기 전 부터 유명했었으며
당시 아주 활발한 빈이라는 도시의 갤러리에 그의 작품이 걸리면서 그는 빈 이라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레 제국의 중심에서 빈 분리파를 결성했다. (아르누보 계열의 장식적인 양식을 선호한 빈 분리파를 결성)
그의 작품이 얼마나 유명하냐면 누구나 이 밑에 있는 kiss 라는 작품을 알고있고 , 또 상업적으로나 제품, 그리고 복제까지 언제 어디서든 세계적인 명화 구스타프 클림트의 kiss 작품을 볼 수 있다. 원래 작품 <kiss> 는 초창기 이름을 "연인들" 이라고 칭했으며 작품이 전시되고 난 후에도 작품을 계속 그리고 후에 완성 시켰다. 초창기 그림은 세부묘사와 꽃밭의 크기가 매우 작았으며 더 디테일하고 세부적인 것을 후에 작업했다. 이렇게 클림트의 작품은 거의 미완으로 끝난 것이 많다.
구스타프 클림트 <kiss> 1907 ~ 1908
그의 작품들은 금박 즉, 금과 은으로 그린 그림이 많은데 이 영감은 종교적 성향이 강한 대성당의 모자이크 그림과 프레스코 벽화를 통해 얻었다. 그는 최초로 금, 은박을 사용한 작품에 사용했다. 아주 얇은 은박을 그림 위에 남겼으며 금 얼룩같이 새겨지고 또 이 금얼룩은 3차원적인 이미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주로 8가지 정도의 금을 사용했는데, 끈적한 동물성 원료를 사용해 금은박이 달라붙게 하기도 했으며 아직까지 어떻게 그렸는지는 복원가들도 추측만 할 뿐이라고 한다.
아래의 그림은 유디트 숙명적 여인이자 아시리아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고 죽인 유디트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도발적이고 외설적인 존재로 각인되어 보이는 그녀의 초상화 모습, 하지만 어떠한 곳에서 살인에 대한 행위의 모사는 존재하지 않다. 표정에서 보면 살인 행위를 한 후에 고통이나 좌절,죄책감 보다는 승리와 자부심 그리고 활홀해 보이는 모습을 하고있다. 또 어떻게보면 아주 매혹적이고 에로틱한 표정을 하고있는 유디트,, 하지만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디트 ll 에서는 눈을 감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쥐고있는 모습으로 마치 살인을 하고 난 뒤에 생각을 도저히 알 수없는 마치 실성한 듯한 모습의 유디트를 그려내었다.
그의 작품을 보면 가장 큰 특징이 있다. 뭐 금 은박 을 제외하고 등장하는 매혹적인 여성들의 모습이다. 여기서 구스타프 클림트의 여성에 대한 사랑을 알 수 있다. 그는 여성을 성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개방적인 성생활은 작업실에서도 계속 되었다. 붉은 머리의 여성을 좋아했던 구스타프 클림트는 항상 작업실에는 붉은 머리의 여성들이 있었다. 제우스의 아이를 가진 한 여인의 다리 사이로 금빛 물이 흘려내려가는 장면 < 다나에 > 작품 뿐만아니라 에로티시즘하고 외설적인 작품들이 많았다. 당시 빈 갤러리에서 유명한 화가로 활동했던 클림트의 작품은 키스로 시작해 점점 더 외설적으로 변해갔다. 뭐 당시는 성적으로 개방적이고 누구나 성에 관심이 많았지만서도 이 작품을 바라보는 중산층은 큰 충격에 빠졌고 외설적인 작품을 모두 비난했다.
<유디트> 구스타프 클림트 1901
"옷을 벗거나 예술의 자유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추한 예술은 안되오!"
그의 작품은 유명하다 못해 엄청난 스캔들을 불러오기 일쑤였다. 너무나도 사실적인 표현들은 마치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 올랭피아 에서 처럼 당시의 숨겨진 풍습을 파해치는 듯한 작품은 모든 이들의 무언의 관념을 시험하는 작품이었다. 환영받지 못했다. 그 후 2차 세계대전 때 그의 작품 대다수가 불에 탔고, 전쟁으로인해 수 많은 작품을 잃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의 예술작품 활동은 대단했다. 빈 분리파의 중심에서 활동하던 클림트의 분리주의 전시회는 분리파 역사에서 정점을 이룬다. 이 전시회는 베토벤을 기리기 위한 전시이기도 했는데, 클림트는 이 전시회에서 종합예술작품을 보여주게 된다. 예술에서 새로운 도전이었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모티브로 만든 베토벤 프리즈 작품이 전시회에 가장 큰 백미였는데, 개막식에는 구스타프 말러가 베토멘 9번 교향곡을 모티브로 편곡한 작품을 직접 지휘까지 했다.
<유디트 II (살로메)> - 구스타프 클림트
그가 얼마나 여성을 사랑했는지... 그는 평생 혼인을 하지 않고 여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았다. 그가 떠나고 나자 14명의 여성이 친자확인소송을 냈는데 그 중 4명이 소송에서 이겼다. 그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여인들의 모습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또는 단지 모델이었을 뿐인 사람들이다. 추상적인 사람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라는 아주 많은 가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델들과 그가 함께 지냈던 사람들은 닮은 구석이 아주 없지는 않다.
째진 눈이라던지, 장난기 넘치는 모습 붉은 머리 또는 매혹적인 눈빛까지.
하지만 그의 여성 사랑 방법은 남달를 수도 있겠다. 작품에서는 포옹이라던지 키스가 기쁨의 절정을 보여주기도하고 성스럽고 아름다운 사랑에 대해 보여주기도 한다.
이렇게 위대하다는 작품을 보면 사실 그저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게 느끼는 중..) 우리가 작품을 너무 쉽게 접해서일까? 컵에도, 공책에도, 심지어 이렇게 블로그에서도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을 손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다. 원작이 아니니까. 원작에서 느껴지는 감동과 심오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마치 길거리 상점에서 나오는 클래식 음악과 공연장에서 오케스트라를 눈 앞에서 듣는 느낌은 경험하지 않아도 분명한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거니까 말이다.
<미네르바 (팔라스 아테나)>
구스타프 클림트
<희망>
<여자 친구들> 구스타프 클림트
<여성의 세시기> - 구스타프 클림트
<처녀> - 구스타프 클림트
<생명의 나무> - 구스타프 클림트
<기사 (베토벤 프리즈의 일부)> - 구스타프 클림트
사진 - naver , © The Bridgeman Art Library - GNC media, Seou
출처: http://mixedart.tistory.com/25 [MIXED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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