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오늘 명랑하거나 우울하거나』

2017. 7. 19. 09:02책 · 펌글 · 자료/인문 · 철학 · 과학

 


 
서른 살을 위한 힐링 포엠 ──





 

 

 

장석주 지음-『오늘, 명랑하거나 우울하거나』(21세기북스, 2012)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시구로 유명한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부터, <시간은 사람을 먹고 자란다> <가을> 등 깊은 울림이 있는 시를 다수 실어, 우리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전해준다. 여기에 장석주 시인의 인간적이고도 배려 깊은 글이 시가 전하는 말에 농도를 더한다. 또 《서른, 비로소 인생이 달콤해졌다》을 쓴 곽효정 작가의 사진들이 함께 실려 있어 시에서 얻은 감동을 더 짙게 음미할 수 있다. 일상과 삶의 무게에 지치고 어깨가 무거울 때, 《오늘, 명랑하거나 우울하거나》는 명랑함에 짙은 미소를, 우울함에 깊이 있는 위로를 더하여 우리 마음을 치유해줄 것이다.

 

 

저자 소개 

 

저자 장석주는 시인, 비평가, 에세이스트. 1955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십대 후반부터 독학으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하고,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입선하며 시인 겸 비평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십대 중반에 ‘고려원’ 편집장을 거쳐 ‘청하’에서 열세 해 동안 대표 겸 출판편집자로 일했다. 그 뒤로는 신문과 잡지에 북리뷰를 쓰고, 동덕여대와 경희사이버대, 명지전문대 등에서 강의를 했다. 국악방송에서 ‘문화사랑방’에 이어 낭독 프로그램인 ‘행복한 문학’의 진행자로 활동했다. 『소설-장석주의 소설창작특강』(2002), 『풍경의 탄생』(2005), 『들뢰즈, 카프카, 김훈』(2006), 『장소의 탄생』(2006), 『상처 입은 용들의 노래』(2010), 『이상과 모던뽀이들』(2011)을 비롯해 시집 『붉디붉은 호랑이』(2005), 『절벽』(2006), 『몽해항로』(2010), 『오랫동안』(2011)을 세상에 내놓으며 그만의 깊이 있는 창작 세계를 드러내 보였다. 현재는 경기도 남단의 작은 도시에서 살며, <세계일보>에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산책」을 연재하고, MBC 라디오의 ‘성경섭이 만난 사람들’에서 ‘인문학 카페’ 코너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2003년 제1회 애지문학상(비평)을, 2010년 제1회 질마재문학상을 수상했다. 지금까지 60여 권의 저서를 펴냈다. 노자·장자·주역과 작은 것들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 담긴 책들을 즐겨 찾아 읽고, 제주도·대숲·바람·여름·도서관·자전거·고전음악·하이쿠·참선·홍차를 좋아하며, 가끔 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점을 치기도 한다. 현재는 경기도 남단의 작은 도시에서 글을 쓰고 있다.

 

 

 

 

 

 

서문

Ⅰ. 외롬과 시림이, 식초보다 아프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 수선화에게(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가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 정호승, 「수선화에게」『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열림원 1998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 정호승, 「내가 사랑하는 사람」

 

 

 

 

 


사랑은 착불로 온다 : 꽃 택배(박후기)

 

 

사랑의 본질은 욕망의 과도함이고, 욕망의 과도함은 충족이 된 뒤에 "밋밋한 습관"으로 떨어지고 결국 종말을 부른다. 그래서 "사랑은 반드시 끝나기 마련이며, 게다가 아름다움보다 더 빨리, 따라서 자연보다 더 빨리 끝난다" 니콜라스 루만,「열정으로서의 사랑」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그 사랑은 종말을 향해 달려간다. 어떤 사랑은 지난 겨울에 시작되었다가 벚꽃이 질 무렵 끝난다.

사랑이 길어지는 것은 저항이나 방해 따위로 인해 그 충족이 한없이 지연될 때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사랑의 과도함이 충족으로 이어지기 전에 죽음으로써 그 사랑은 영원한 지속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결혼은 어떨까. 결혼을 지속시키는 동력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 식어버린 뒤에도 그 사랑을 이어가야만 한다는 윤리적 당위성이다. 대개의 사랑은 끝난 뒤에 더 길게 이어진다.

사랑은 그것에 대한 추억이나 회상 속에서만 생생해진다. 유행가와 영회에 그 많은 자양분을 대어주는 것은 지속되는 사랑이 아니라 깨진 사랑들이다. 그 많은 가수와 기획사들은 깨진 사람의 마음들에 기생해서 살아간다. 실연이 언젠가는 보상받으리라는 낭만적 환상들을 판다. 깨진 사랑에게서 유산을 상속받는 것은 "내 마음"이다. 깨진 사랑을 방부처리해서 시간에 의한 소멸을 유예시키는 것이다.

 

 

 


나는 이별을 하고, 빨래를 하고, 낮잠을 잔다 : 이별의 능력(김행숙)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 반가사유(류근)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함석 간판 아래 쪼그려 앉아

빗물로 동그라미 그리는 여자와

어디로도 함부로 팔려가지 않는 여자와

애인 생겨도 전화번호 바꾸지 않는 여자와

나이롱 커튼 같은 헝겊으로 원피스 차려입은 여자와

현실도 미래도 종말도 아무런 희망 아닌 여자와

외항선 타고 밀항한 남자 따위 기다리지 않는 여자와

가끔은 목욕 바구니 들고 조조영화 보러 가는 여자와

비 오는 날 가면 문 닫아 걸고

밤새 말없이 술 마셔주는 여자와

유행가라곤 심수봉밖에 모르는 여자와

취해도 울지 않는 여자와

왜냐고 묻지 않는 여자와

아,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저문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사람 같은 거 믿지 않는 여자와

그러나 꽃이 피면 꽃 피었다고

낮술 마시는 여자와

독하게 눈 맞아서

저물도록 몸 버려야지

돌아오지 말아야지

 

- 류근, 「반가사유」 『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사 2010

 

 

"모든 지나간 사랑은 내 생애에 / 진실로 나를 찾아온 사랑 아니었다고 말해"독백」버리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나'에게 왔다가 지나간 사랑들은 사실은 진실로 '나'를 찾아왔던 사랑들이다. 다만 그 사랑들이 '나'에게서 사라져 없을 뿐이다. 사랑은 사라지고 그 뒤에 그것에 소외된 취객이 하나 남을 뿐이다. 그러므로 "상처는 나의 체질"이라고 중얼거리는 취객이 있다면, 그는 분명 실연자일 것임에 틀림없으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그를 붙잡아 술집으로 끌고 들어가 한 잔 더 마실 일이다.

 

 

 


잃어버린 ‘나’에게로의 초대 : 고요로의 초대(조정권)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 무거운 머리는 이리 주시고요

그 헐벗은 두 손도

 

- 조정권, 「고요로의 초대」 끝 부분

 

 


가장 아름다운 사랑도 약간은 쓰다 :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송찬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입안의 비린내를 헹궈내고

달이 솟아오르는 창가

그의 옆에 앉는다

 

이미 궁기는 감춰두었건만

손을 핥고

연신 등을 부벼대는

이 마음의 비린내를 어쩐다?

 

나는 처마 끝 달의 찬장을 열고

맑게 씻은

접시 하나 꺼낸다

 

오늘 저녁엔 내어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여기 이 희고 둥근 것이나 핥아보렴

 

 

- 송찬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2009

 

 

 


여자들은, 이미, 젊지 않다 : 고통을 발명하다(김소연)

 

마음이 한 자리에 못 앉아있을 때 : 울음이 타는 가을 강(박재삼)

 

사랑을 잃었네 : 빈집(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기형도, 」빈집」『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 지성사 1989

 

 

 


이미 울다 간 바 있는 봄 : 능가사 벚꽃 잎(황학주)

 

사랑_ 그 지옥으로, 웃으며, 자발적으로 : 전갈(류인서)

 

외롬과 시림이, 식초보다 아프다 : 강(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 황인숙, 「강」2003

 

 

 

 

Ⅱ. 꿈이 꿈을 떠나고, 노래가 노래를 잃었을 때

오늘 나는, 새로워지고 싶다 : 오늘 나는(심보선)
한없이 서 있는 뒷모습에게 : 뒷모습(이병률)
현명하게 기차를 타고 떠나는 방법 : 목요일마다 신선한 달걀이 배달되고(이근화)
아직도 먼 봄, 이미 아프다 : 방을 깨다(장석남)
청춘의 망명정부가 있다면, : 무가당 담배 클럽에서의 술고래 낚시(박정대)
청년은 울지 않는다, 다만 청년 안에 소년이 운다 :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유희경)
나는 무엇이고,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가 :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조용미)
시간은 사람을 먹고 자란다 : 시간은 사람을 먹고 자란다(정진혁)
해가 많이 짧아졌다 : 가을(김종길)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들 : 거울 속 일요일(이혜미)
꿈이 꿈을 떠나고, 노래가 노래를 잃었을 때 : 무인도(김요일)

 

 


Ⅲ. 진부하고 공소한, 그럼에도 현실

말랑말랑하게 산다는 것 1 : 긍정적인 밥(함민복)
말랑말랑하게 산다는 것 2 : 밀가루 반죽(한미영)
그래도 살아볼 만한 인생 :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박철)
오늘, 우울하거나 명랑하거나 : 정오의 희망곡(이장욱)
내 삶이 비루하고 구질구질하다 느낄 때 : 별을 보며(이성선)
아침이었는데 벌써 저녁이다 : 어떤 하루(강기원)
어느 신명나는 날 : 시골길 또는 술통(송수권)
내 안의 집착에 진절머리가 나면 : 너와집 한 채(김명인)
심심하면, 그래도 심심하면 : 장마(김사인)
살아있음의 기쁜 슬픔으로 : 나 떠난 후에도(문정희)

 

 

나 떠난 후에도 저 술들은 남아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사람들을 서서히 죽이겠지

 

나 떠난 후에도 사람들은

술에 취해

몸은 땅에 가장 가까이 닿고

마음은 하늘에 가장 가까이 닿아

허공 속을 몽롱하게 출렁이겠지

 

혀끝에 타오르는 불로

아무렇게나 사랑을 고백하고

술 깨고 난 후의 쓸쓸함으로

시를 쓰겠지.

 

나 떠난 후에도

꿈 같은 죄와 악마들은 남아

거리를 비틀거리며

오늘 나처럼 슬프게 돌아다니겠지

누군가 또 떠나겠지

 

 

- 문정희, 「나 떠난 후에도」 2010

 

십대 때 이미 첫 시집을 낼 정도로 조숙이던 시인은 미당 서정주 문하에 들어 시를 배운다. 모국어의 장인은 이 감수성의 천재에게 언어를 다루는 법을 전수한다. 문정희 앞에 열린 시의 길은 탄탄대로였다. 시인은 순조롭게 등단을 하고 시짐을 내고 이름을 널리 알렸다.

문정희에게는 그늘과 그림자가 없었다. 시인은 화려한 외모와 언변을 갖고 그걸로 늘 좌중을 휘어잡는다. 음지라고는 도무지 모른 채 오직 양지의 수혜 속에서 제 삶을 양육해온 듯 화려한 외모와 언변 밑에 숨은 극한의 외로움과 고통의 나락에서 내지르는 울부짖음. 불행에 대한 위험한 탐닉을 우리는 잘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시인이 쌓은 시의 성채에서 부와 그것의 화려한 외관, 그리고 비상한 활력만을 보았지 그 밑에 은닉된 치명적인 가닌과 침울한을 보지 않는다. 그래서 문정희는 가장 잘못 알려진 시인, 가장 오독되는 시인이 되었다.

 

 

 


훠얼훨 사르며 시간 마루를 넘어서 : 메주(정재분)
한 생을 산다는 것은 : 운동장을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유홍준)

 

 

가로질러간다는 것은 저절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가로질러가는 사람은, 길쭉한 사람이다 

다리도 길고 목도 길고 뒤통수도 긴 사람이다

 

어깨 축 처진 검정 옷을 입은 사람이다

제 삶이 어떤 건지 미리 한번 중간점검해보는 사람이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

한가운데 서 보는 사람은

 

차마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 흙먼지를 오지게 한번 뒤집어써보는 사람이다

어디 피할 데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사람이다

마치 고문당하는 사람이고 마치 숙청당하는 사람이다

모름지기 인간의 그림자가 이렇게 길고 이렇게 홀쭉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사람이다

 

가로질러간다는 것은 스스로 고개를 꺾는 것이다

 

그림자 중에 가장 긴 그림자는

운동장에 드리운 그림자다

 

 

- 유홍준, 「운동장을 가로질러간다는 것은」 『저녁의 슬하』 창비 2011

 

 


닳고 닳음에도 다 사연이 있더라 : 머나먼 돌멩이(이덕규)
진부하고 공소한, 그럼에도 현실 : 꽃잎 날개(김영승) 

 

 

Ⅳ. 누구나, 가슴에 벼랑 하나쯤 품고 산다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눈물이 절반이다 : 육탁(배한봉)
흘러간 세월은, 구체적이다 : 잘 익은 사과(김혜순)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청춘에게 : 연가9(마종기)
씹히거나, 씹힘을 당하거나 : 껌(김기택)
나를 버린 당신, 당신을 버린 나 : 겹(김경미)
그 많던 청춘들은 다 어디서 떠돌고 있을까 : 배꽃은 배 속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다(이문재)
어머니는 동백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 멍(박형준)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 밀물(정끝별)
풀은 바람보다 빨리 일어난다 : 풀(김수영)
누구나 가슴에 벼랑 하나쯤 품고 산다 : 나무는 도끼를 삼켰다(이수명)

 

 

 

 

 

속으로

사랑은 그것에 대한 추억이나 회상들 속에서만 생생해진다. 유행가와 영화에 그 많은 자양분을 대어주는 것은 지속되는 사랑이 아니라 깨진 사랑들이다. 그 많은 가수와 작곡가와 기획사들은 깨진 사랑의 마음들에 기생해서 살아간다. (23쪽)

“내 마음” 속에는 안녕이라고 말하고 떠난 사람이 남아 있다. 그 사랑은 깨졌고, 더는 과도함도, 충족도 불가능해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깨진 사랑을 방부처리해서 시간에 의한 소멸을 유예시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나’는 늙지만, 젊은 어느 시절에 정지된 사랑은 여전히 파릇한 젊음 속에서 빛난다. (25쪽)

이별의 능력이란 먼저 이별할 수 있는 능력이고, 다음은 그 후유증을 견디는 능력이고, 마침내 자아를 살육하는 부재와 고요히 다가오는 심장마비를 극복하는 능력이다. (31쪽)

사랑은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불가사의한 힘을 가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랑이 깊으면 그것이 끝났을 때의 상실감과 덧없음도 커지는 법이다. (72쪽)

올해 벚꽃은 유난히도 희고 눈부셨다. 벚꽃 아래서 내 마음이 자꾸 허방을 짚고 어둔 심연 속으로 떨어지곤 했다. 허랑방탕하게 흘려보낸 시간들이 솟구쳐 가슴을 치고, 꿈속에서는 멀리 떠나보낸 사람들이 자꾸 나와 울었다. 정말 가슴이 먹먹해질 만큼 아름다워서 슬픈 봄이었다. (77쪽)

등을 돌리는 것은 등 뒤에 남은 것들을 버리거나 포기하는 것이다. 마음의 모진 결단 끝에 등을 보이는 사람은 등을 보는 사람보다 착하다. (103쪽)

청년은 울지 않는다. 다만 청년 안에 있는 소년들이 운다. 그 울음은 끈질기다. 그 소년은 유희경의 어린 시절을 가리키는 것일까. (132쪽)

어디로도 떠날 수 없는 사람에게 하루는 길고 지루하다. 아마도 시란, 혹은 예술이란 그 길고 지루함에 대한 보상행위가 아니었을까. (166쪽)

시인은 그 착한 심성으로 시를 써서 밥을 구하는 제 삶을 지긋이 들여다본다. 시 한 편을 써서 버는 돈은 삼만 원인데, 시 한 편에 들인 공력을 생각해 보면 억울하다고 적는 시인의 마음에 충분히 공감하는 것은 그게 그대로 시인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까닭이다. (175쪽)

그때 밤을 세워 무슨 얘기를 했던가. 세월은 숫사슴처럼 껑충껑충 뛰어 저 숲속으로 달려 나갔다. 스무 해 넘는 세월은 우리를 각각 다른 기착지로 데려다 놓았다. (265쪽)

가끔 한밤중 조용히 귀 기울이면 나를 떠나간 사람들, 지금은 어디에 사는 지도 모를 그들이 나를 애타게 부르는 듯하다. 아니 그들이 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내가 그들을 애타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275쪽) 

 

 

 

출판사 서평  

이쪽도 저쪽도 아닌 ‘방황하는 서른’을 위로하는 치유의 말들
여기 8시까지 출근해 앉아 있는 한 사람이 있다.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밖을 보니 하늘도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흰 달이 떠 있다. 열심히 또 제대로 뭔가 잘 해내고 싶었지만, 내 신세는 오늘도 어김없이 치이는 바닥의 돌 같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위로의 말은 이제 20대만 ‘청춘’이라 이른다. 서른도 방황하고 고민하고 상처받는다. 지금은 청춘도 아니고 중년도 아닌 서른의 시절은 누구에게 위로 받아야 좋을까?
<대추 한 알> <마지막 사랑> 등의 시로 유명한 장석주 시인이 지난 5년간 <탑 클래스>에 연재한 칼럼을 엮어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오늘, 명랑하거나 우울하거나》는 지친 마음과 영혼을 안아주는 ‘힐링’을 주제로 한 시 에세이로, 사랑에 대한 기쁨과 슬픔, 이미 저버린 하루에 대한 아쉬움, 못다 한 것들에 대한 후회처럼 우리 마음에 까끌하게 남은 감정을 치유해주는 말들이 담겼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시구로 유명한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부터, <시간은 사람을 먹고 자란다> <가을> 등 깊은 울림이 있는 시를 다수 실어, 우리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전해준다. 여기에 장석주 시인의 인간적이고도 배려 깊은 글이 시가 전하는 말에 농도를 더한다. 또 《서른, 비로소 인생이 달콤해졌다》을 쓴 곽효정 작가의 사진들이 함께 실려 있어 시에서 얻은 감동을 더 짙게 음미할 수 있다.
일상과 삶의 무게에 지치고 어깨가 무거울 때, 《오늘, 명랑하거나 우울하거나》는 명랑함에 짙은 미소를, 우울함에 깊이 있는 위로를 더하여 우리 마음을 치유해줄 것이다.

상처를 딛고 진짜로 사랑하기, 진짜로 행복하기!
“말은 주술적인 힘을 품고, 상상력은 마법 같은 감정의 변화를 불러온다. 말과 상상력으로 이루어지는 시에는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며 휴식과 위안을 주고, 실제로 통증을 줄이고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힘이 있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듯 《오늘, 명랑하거나 우울하거나》는 시를 통해 마음을 이완시키려 했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일상의 외로움과 고독을 돌아보며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여타의 시 에세이와 차별되는 부분이 있다.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 두 척의 배가 /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 벗은 두 배가 / 나란히 누워 /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 응, 바다가 잠잠해서
-「밀물」, 정끝별, ‘Ⅳ. 누구나, 가슴에 벼랑 하나쯤 품고 산다’ 중

온전히 한 사람의 몫을 해내야 하는 서른에게 ‘산다는 것은 치열’하게 하루를 이겨낸다는 것과 같다. 정끝별 시인의 <밀물>은 이와 유사하게 치열함 속에 사는 당신과 내가 만나 상처를 어루만지는 광경을 묘사한다. 이 시를 읽고 나면 그대로 글자를 응시하며 나라는 섬과 저들이라는 섬 사이의 먼 거리를 생각하게 되는데, <밀물>에서는 두 척의 배로 이 거리를 표현한다.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라고 말해줄 수 있는 그런 관계를 꿈꾸게 한다.

사랑은 언제나 착불로 온다 // (중략) // 집 없는 나는 꽃 피는 / 당신을 만나야 한다 / 꽃잎은 끊임없이 / 억겁의 물류창고를 빠져나가고, / 사월의 허공이 / 태초의 발송지로 / 반송되는 꽃잎들로 인해 / 부산하다
-「꽃 택배」, 박후기, ‘Ⅰ. 외롬과 시림이, 식초보다 아프다’ 중

사랑의 시작점에 섰을 때, 사랑의 설렘과 풋풋함을 노래한 모든 유행가와 가슴 떨리는 멜로 영화가 내 이야기 같듯이, 이별의 종착역에 닿을 때면 내 이야기 같은 노래만 귀에 들어오듯이, 사랑에는 늘 지불해야 하는 ‘감정의 비용’이 있다. 유행가와 영화의 소재가 되고 공감을 얻는 것이 늘 깨진 사랑의 조각이듯 사랑에 드는 ‘감정의 비용’은 이별의 것이 더 크다. 그럴 때 ‘사랑은 언제나 착불로 온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처음 내는 비용보다 뒤늦게 치러야 할 먹먹한 감정의 비용을 떠올리면, 그것이 오래된 사랑이더라도 우리의 마음에는 사랑이 반송한 것들로 꽉 채워진다.

저자는 “아프고 괴로울 때 시인의 눈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며 희망을 찾고 병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시의 영감들을 어떻게 치료의 매질(媒質)로 쓸 것인가? 힐링 포엠은 그런 아이디어에 바탕을 두고 착상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통찰력 있는 관찰로 아무것도 아닌 일상에 새로움을 불어넣는 일은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시인의 눈을 통해 우리 역시 희망을 발견하고 위로의 말을 귀에 담고, 거기서 치유 받아 나 역시 다른 사람을 감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시에서 찾을 수 있는 많은 가치 중 하나가 아닐까?

《오늘, 명랑하거나 우울하거나》에 담긴 시를 통해 삭막한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따뜻하고 온전한 시선으로 이 봄을 맞아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