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1. 20:04ㆍ이런 저런 내 얘기들/내 얘기.. 하나
수연님이 본가(本家)라고 하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부모님이 사시는 집일 뿐입니다.
아버지가 금년에 83세이신데, 57세 전후에 이 곳에 들어오셨습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입니다.
저나 아버지나 고향은 강원도 인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가 순전히 발품을 팔아가며 싼 집을 구하다가 재수좋게 걸린 집입니다.
원래 사시던 집은 형님에게 물려주셨습니다. 좀 이른 나이셨지요.
그러니 '본가'라고 할려면 지금 형님이 사시는 집을 일러야 맞습니다.
처음엔 형편도 없었습니다. 형편 없는 정도가 아니라 흉가(凶家)라고 소문이 돌았던 집입니다.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이 다 안 좋은 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터가 세다'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아버지가 이 집에 처음 이사오셨을때에도 동네사람들끼리 수군거렸었답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지리책 좀 읽으셔서 반풍수는 되십니다.
아버지가 보시기에도 집터가 드물게 보는 명당이긴한데 텃기가 세게 느껴지더랍니다.
어머니도 이사 오셔선 밤에 화장실 가기가 꺼려지셨다더군요.
낮에도 집 뒤로 돌아갈땐 산밑 쪽으로 자꾸 두리번거려졌답니다.
대문 바로 옆에 있는 헛간 같은 것이 화장실입니다.
지금은 물론 실내에 화장실을 하나 더 만들었습니다.
'집터가 세다'라는 것은 둘 중 하나입니다.
사람의 기(氣)가 세어서 집터를 누르면 명당(明堂)이 되는 것이고,
사람이 집터에 눌리면 흉가(凶家)가 되는 것입니다.
원래 이 집터는 이완용이가 말년에 들어와 살려고 잡아 논 터였답니다.
집 뒤에 보이는 山산이 있지요? 지금도 저 山의 임자가 이완용이 손자입니다.
산 뒤로 돌아가면 커다란 창고가 있습니다.
이 산에서 나는 임산물 집하장으로 지은 것인데, 그 손자가 들락날락하면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을 인부로 쓰고 있는 모양입니다.
지금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보은 속리산에 가면 'ㄱㅎ식당'이라고 한정식 집이 있습니다.
거기서 이완용이 손자를 만났습니다.
상머리에 찾아와서 이 나물이 뭐고 저 나물이 뭐고를 설명해주더군요.
그 자리에선 차마 당신이 이완용이 손자냐곤 못 물어봤습니다.
아버지가 여기에 사신다니까 금방 알아듣고 조심스레 반갑다고 합디다.
이완용이가 누굽니까? 나라를 팔아먹을 정도로 배포가 큰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 아버진 어림도 없습니다. 울 아버진 남의 돈 십원도 못 떼먹는 사람입니다.
집터가 200평 정도 되고 밭이 800평이 좀 안될 겁니다.
집터치곤 작은 터가 아니지요.
아마 집 손질하는데 3년은 꼬박 걸렸을 겁니다.
돈 한푼 안 들이고 몸으로만 모든 걸 해결하려니까 그런 점도 있었지만
뭐 하나 손을 대려면, 하다못해 돌뿌리 하나 캐는 것까지도 아버지가 향(向)이며 날(日)을 다 받아서
조심스럽게 일을 하다보니까 그리 된 이유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래 그런지 무탈하게 이십 수 년을 보냈습니다.
어느 집이고 보면 우환거리가 없는 집이 없잖습니까.
물론 우환도 우환 나름이겠습니다만 그래도 우리 집은 부모님을 포함해서 크게 병 난 사람도 없었고,
사고도 없었고, 아이들도 잘 컸고, 그만하면 다들 무고(無故)하게 지냈던 편입니다.
아버진 늘 그걸 집터 덕분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원래도 펌프 우물이 있던 자리인데, 우리가 다시 팠습니다.
10미터 넘게 팠습니다. 땅 속이 암반이더군요. 애먹었습니다.
여기 집터도 그렇지만 뒷산도 속으로는 암반 덩어리입니다.
그래서 집이 산 밑에 바싹 붙어있어도 사태가 날 염려 같은 것은 없습니다.
진짜 명당터인가 봅니다.
마당에 심은 소나무들, 전부 아버지가 혼자서 뒷산에 올라가셔서 캐다가 심은 나무들입니다.
지금은 돈으로 쳐도 꽤 값이 나간다고 그러더군요.
그보다도, 그동안 저기에 아버지가 매달렸던 정성과 세월을 생각하면 함부로 할 수 없는 나무들입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애착을 갖고 계시겠습니까?
그런데, 자식들 중에 누구도 들어가서 살겠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런 취미 가진 사람이 없거든요.
그러니 이게 큰 문제입니다.
아버지도 한 때는 제가 사는 아파트 옆으로 이사 나와 보실까 반 결심까지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저 나무들을 생각하니 차마 못 떠나시겠던 모양입니다.
이 집에서 남은 여생을 마치시겠답니다.
저도 포기했습니다. 그럴만 하고도 남거든요.
아직은 겨우겨우긴 하지만 두 분이 그런대로 사시긴 하는데, 늘 죄스럽고 걱정되고 그렇습니다.
요즘에 의료보험 공단에서 간병을 겸해서 가사도우미까지 지원해주는 제도가 있잖습니까.
물론 아무나 해주는 것은 아니지요.
심사가 까다롭답니다. 거의 운신을 못할 정도라야 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본인 부담은 매달 12만원인가만 내고, 모든 걸 정부 예산으로 해주는 것이니까 당연히 심사가 간단치가 않을테지요.
빨래니 뭐니 모든 일을 대신해주고, 목욕도 시켜드리고, 병원도 직접 모시고 다니고, ... ,
되기만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마침 부모님 사시는 근처에 노인 요양원을 운영하는, 좀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께 전화로 사정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계통에 있는 사람들 끼리는 그래도 통하는 게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요.
심사를 통과할 수 있을런지는 역시 방문을 해봐야 알겠다더군요. 가급적 잘 되도록 처리하마 했습니다.
며칠 있다가 전화가 왔더군요. 부모님께 다녀왔답니다.
어머니의 상태가 그런 도움을 받을 정도는 아니더라더군요.
그럼에도 어찌어찌 해서 될 수 있도록 해드려 볼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아버지가 거절하시더랍니다.
그 제도의 취지 말씀을 듣더니, 그렇다면 우리보다 더한 사람이나 도우라고, 아직은 우리끼리 할만하다면서 괜찮다고 하시더랍니다.
그러니 어떡할까요, 묻더군요.
알겠다고,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혹시 다시 부탁드리게 될지 모르니 귀찮게 생각지 마시고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참,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두 살이 위십니다. 85세십니다.
저 밭, 이제는 다 남 줬습니다. 물론 꽁짜지요.
담 옆에 붙어있는 두 세 고랑만 감자나 고추 같은 거 심으십니다.
이제 곧 김장거리 심어야겠네요.
아버진 농사일을 죽어라 싫어하십니다.
싫기도 싫어하시지만, 비료니 뭐니 해서 돈 들어가는 게, 사먹는 거보다 훨씬 더 먹힌다는 걸 잘 아시거든요.
전부다 어머니 때문에 농사를 지셨던 겁니다.
땅이 아깝기도 하지만 어머닌 뭘 심어서 싹이 나고, 크고, 수확해서, 자식들 오면 노놔주는 걸 유일한 낙으로 사셨습니다.
어머니가 오래 전에 인공관절을 하셨습니다. 지금도 무릎이 션찮으십니다.
그보다도 이젠 연세가 있으시니까 힘에 부쳐하십니다.
참, 금년에 배가 아주 잘 열렸습니다. 우리 배가 참 맛있습니다.
그런데 마당에다 배나무나 사과나무 같은 건 심을 게 못 되더군요.
한 두 그루 정도야 취미로 기른다치지만, 예닐곱 그루면 얘기가 다릅니다. 그거 큰 일거립니다.
처음에 열매 맺힐때 씌우는 종이봉지를 이번에 제가 씌웠는데, 허리 아파서 죽을뻔 했습니다.
채봉님, 이거 메론입니다. 유럽엔 메론이 안 나는 모양이죠?
우리 밭 부치는 사람이 옆에서 비닐하우스에다 심은 겁니다.
농지 빌려쓰는 댓가로 저거 다섯개 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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