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10년쯤 선배들 카페

2009. 6. 12. 07:08이런 저런 내 얘기들/내 얘기.. 하나

 

 

 

  김옥희 작은 김정숙 오음전,   어느날 학교가 그리워서 셋이서 만나 한 컷
  1968년 갑짜기 정숙이를 만나서

  인제 초등학교를 가게되었던 기억으로 생각된다 

  뒤에 보이는 학교가 옛날 우리가 배우던 그 학교임에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익자야 옛날 사진 좀 올리라고해서 함 올려봤다 ㅋㅋ
   시간나는대로 익자 사진도 찿아서 올려줄께  
.  익자야 니 사진은 독사진 수학여행 가서 찍은 것 몇장있드라
   내가 요즘 바쁘니 언제인가 올려줄 것이니 카페나 가입해라    
.  그리운 옛날이여~~어~~~~~~~~~
   아름다운 추억이 서린 사진 잘 보고 간데이~~~친구야   
.  인간들 보지말고 뒤에 우리가 다니든 학교네
   난 내가 심은 나무를 기억하고 있는데...   학교가면 알지  ~~~ 
.  이젠 그 학교가 자취도 없다니
   그리워도 소용없어 그러니까 이 사진에서 뒤만 보라구   ㅎㅎㅎ    
작은 정숙아 어제 전화로 이야기 많이 들었다   너도 등업해라
   이렇게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어디 있니  ~~~ 
.  뭐 니 사진이 어때서 
   나같은 호박같은 얼굴과 찐빵도 앙꼬엄는 빵인데 ~~ 
투정말고 등업해
   우리 나이가 얼마인데 이것저것 따지냐 보면 즉시 알지    ㅎㅎㅎ
 

 

  

 

혹시 초등학교 동창들이 모임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둘러보다가 우연히 알게 된 카페다.

대략 10년쯤 선배되시는 분들이더라.

'대략'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내가 5학년 1학기까지 마치고 전학을 갔기 때문인데

졸업 기수도 모르고... 솔직히 선생님이나 친구들 이름도 기억이 안 난다.

뭐, 간단히 쉽게 말해서 난 인제 국민학교 동문이라고 말할 입장이 아니다.

 

  

충북 ○○邑으로 전학을 갔는데 ○○邑만 해도 청주에서 가깝다보니 진학할 학교의 선택의 폭이 넓었다.

초·중·고가 한줄로 쪼로록 붙어있던 인제(隣蹄)와는 교육 분위기가 사뭇 달랐는데,

그런데 또 어찌된 일인지 전학과정의 학무처리를 제대로 못해서 거의 1년 동안을 쉰 꼴이 되고 말았다.

결국 6학년 1학기가 끝나갈 즈음에야 정식으로 학교를 다시 나갈 수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다른 아이들은 그때 이미 6학년 1학기는 물론이고 2학기까지 전 과정을 끝내고는

온갖 데서 가져오는 이런 저런 시험지만을 반복해서 푸는 상황이 돼버렸다.

.......

 

얼마나 막막했겠냐?

하소연 할 데도 없고 그냥 뭍어서 시험을 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다고 답안지를 공란으로 낼 수는 없으니 아무케나 써넣어야 했던 창피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시엔 집안 환경마져도 난가(難家)여서 잠자리조차도 편치 못할 때였으니 과외 같은 것은 꿈도 꿀 처지가 아니었다.  

물어볼 것도 없이 노상 꼴찌였는데,

이러다가 중학교도 못 들어가고 진짜 빈둥대는 놈이나 될까봐 어린 맘에도 걱정이 많았다.

 

배우지도 않고 보는 시험이었지만 그것도 자꾸 치다보니 어렴풋이 감이 잡히긴 하더라.^^

솔직히 분수를 중학교 들어가서 혼자 몰래 깨우쳤다.

암튼 겨우겨우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더니 담임선생님이 아버지한테 한턱을 내라시더란다.

그래도 내가 입학한 ○○중학교가 한 학년이 여섯개 반 정도는 되니까 작은 학교는 아니었는데 

당시에 상위권 아이들은 모두 청주로 진학한 걸 생각하면 열통 두드리는 말이다.

  

 

6학년 내내 참으로 힘겹게 지냈다.

책상 배정을 성적순으로 했는데,  급수(級數)대로 1분단~6분단 나누고,

다시 또 앞줄로부터 순위에 따라 앉혔다.

나야 당연히 컴컴한 구석에서 인민복 차림의 머슴같은 놈과 짝꿍이 됐는데, 알쪼 아니냐?

그 놈이나 내나 둘 다 까막눈이라서 동병상련의 위로가 될 듯하지만 그게 아니다. 오히려 슬픔만 배가 될 뿐이었다.

 

가뜩이나 기죽어서 지내는 판에 선생이 그러더라 ;

 "너 진짜 거기서 학교는 다니다 왔냐?" 

아, 그 말을 듣는데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 책상에 머리 쳐박고 엉엉 울었다.

 

아침 7시경에 등교해서 별빛이 선명해지는 밤 8~9시나 돼서야 집에 돌아왔는데,

그러다보니 하염없이 창 밖으로 별 뜨기만을 기다렸다.

국민학생때니 망정이지 중학생 정도의 나이만 됐어도 미쳐버렸을 것 같다.

 

점차 말을 잃어버린 아이가 돼버렸는데, 부모님도 어찌 눈치를 채셨던지

반 친구들을 데리고 영화구경이라도 시켜주라고 하더라.

나중에 극장 간 거 선생한테 들켜서 뒈지게 맞았다.

곤궁한 형편임에도 어머니가 큰 맘 먹고 무리한 거였는데, ... , 또 신세가 처량해서 많이 울었다.

 

그렇더라도 부모님은 설마하니 내가 꼴찌를 하고 있을줄은,

또 내가 그렇게 힘들어 하는줄은 모르셨을 것이다.  

..... 암튼 그렇게 국민학교를 마쳤다.

 

      

  

 .

   

 

하 서러운 꼴을 당하며 살아선지, 먼저 다니던 인제 국민학교가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는 거다. 

그래서 아버지께 제안을 했다. 반에서 공부 1등을 하면 여름방학에 인제(麟蹄)를 보내달라고.

얼토당토 않다고 생각하셨는지 바로 오케이하시더라. 

 

어떻게 꼴찌를 하던 놈이 갑자기 1등을 하겠냐겠지만,

진짜로 했다. 입학하고 세 달만에 1등을 했다.  

못 배웠던 국민학교 과정, 특히 수학을 남모르게 숨어서 혼자 연구해서 깨쳤다.^^

 

결국 그렇게해서 인제를 가게 되었는데,

당시엔 버스를 5번인가 6번이나 갈아타야했다.  

콜레란가 장티푸슨가 전염병 예방주사까지 맞아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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