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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내 얘기들/내 얘기.. 하나

봉하마을 문상을 다녀와서

 

 

 

 

 

 

 

블로그나 카페에 소개한, 다녀온 사람들의 얘기를 대충 들어보면

ktx를 타고 양산역에서 환승을 해서 진영역으로 가라고 했던데,

진영역에 가보니까 동대구역에서 환승하는 걸로 안내를 합디다.

 

나는 기차표를 예매할때 '진영'이 바로 나오길래 어찌된 영문인가 했습니다.

분명히 환승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막바로 간다니 말이지요.

기차를 타고나서 안내방송을 들어보니 종착역이 마산이라고 합디다.

그래서 여승무원에게 물어봤습니다. 이 철로(鐵路) 이름이 뭐냐구요.

여승무원도 모르겠답니다. 경부선이야 물론 아니겠고 그렇다고 경마선도 아니고,

대구에서 갈라지니까, 그렇다면 대마선? 구마선?

전자수첩처럼 생긴 걸로 두들기며 보여주는데 거기도 안 나옵디다.

결국 알아보마 하며 갔는데 도착할때쯤 돼서 남자 승무원이 찾아왔습니다.

《경전선》이랍니다.

경상도 '경(慶)'과 전라도 '전(全)'이 합쳐져서 '경전선(慶全線)'이라고 부른다는 겁니다.

마산에 가면 전라도로 연결되는 기차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도, 이번에 카메라를 가져가야 할지 말지를 놓고 고민했습니다.

비통한 마음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렇더라도 역사적 현장이기에 기록을 남기기로 했습니다

포켓용 조그마한 카메라를 가져갔습니다.

   

모든 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저 역시도 여전히 맘을 추스리지 못하겠습니다.

허접하나마 진즉에 추모의 글 하나는 올려드렸어야 했는데 분노가 치밀어서 통 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깊고 많은 얘기는 못하겠고 그저 다녀온 자취나 간략히 적고 말 생각입니다. 

  

 

 

 

 

 

  

대전역에서 10시 20분 기차를 탔습니다. 세시간 정도 걸립니다.

진영은 시가 아니지요? 읍이지요? 그런데도 내리는 사람이 이리 많습니다.

 

 

 

 

 

 

  

철로를 건너자마자 줄을 섭니다.

자원봉사 나온 분들이 안내를 하는데, 전부가 다 봉화마을로 가시는 분들입니다.

햇볕이 꽤 따가왔습니다만 다들 각오했다는 눈치더군요.

 

 

 

 

 

  

진영역에서 바로 셔틀버스로 갈아탑니다.

빡빡하게 타니까 한 車에 70~80명쯤 탑니다. 버스가 10분 간격으로 옵니다.

20분쯤 걸립니다. 

늘어선 만장과 謹弔라고 쓴 현수막을 보니, ......... ,

눈물이 핑 돌며 그제서야 실감이 나더군요.

 

 

 

 

 

 

  

입구에서 나눠주는 종이 모자가 큰 도움이 됐습니다. 햇볕이 얼마나 강하던지.

다행히 바람이 많이 불어서 덥진 않았습니다.

 

 

 

 

 

 

  

봉하마을 전방 900 미터.

여기까진 줄없이 뒤섞여 옵니다. 급한 사람은 앞질러 올 수도 있습니다만,

이 지점부터는 5사람씩 줄세웁니다. 추월 못합니다.

 

 

 

 

 

  

노무현에게는 추억이 어린 특별한 곳이겠지만

일반 사람들에게는 그저 그런 시골 농촌일 뿐입니다. 경치래야 논바닥 뿐입니다.

 

 

 

 

 

 

 

  

남녀노소의 비율은 비슷한데, 20~30대가 약간 많은 편입니다.

 

 

 

 

  

저 뒤에 보이는 건물이 '아방궁'인 모양입니다.

그냥 평범한 조립식 건물입니다.

 

온통 사람에, 천막에, 현수막에, ... ,  어디가 어딘지를 모르겠더군요.

 

 

 

 

  

뒤에 보이는 툭 불거진 바위가 바로 그 부엉이바위인가 봅니다.

사복경찰들이 산 전체를 에워싸고 있더군요.

 

 

 

 

 

 

 

 

  

보시다시피 30명 정도씩 조문을 합니다. 1분도 채 안 걸립니다.

사람이 많다보니까 엎드려 절을 할 수가 없게 생겼습니다. 시간상으로도 그렇구요.

조문 받는 사람 면면을 보니 당시에 뭔 직함을 가졌던 듯한데 경호실장빼고는 누군지 긴가민가합니다.

 

 

 

 

 

 

 

  

나는 한 두끼 굶어도 별로 티내는 사람이 아닌데, 이 날은 왜 그렇게 허기가 느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내 바로 앞에서 국밥이 떨어졌다지 뭡니까? 그리곤 빵과 떡을 주더군요.

가뜩이나 속상해서 목구멍이 까칠한데 빵이 넘어가겠습니까. 결국 이 날, 점심 굶었습니다.

 

 

 

 

 

 

 

 

 

 

 

  

노사모 회관입니다. 분향소를 별도로 또 하나 만들어놨습니다.

명계남씨가 조문을 받는데 많이 지쳐보입디다.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더군요.

장례비용의 상당부분을 노사모가 감당했다고 들었는데,

노사모 홈피에 가면 후원방법이 나와있습니다.

 

  

 

 

 

 

 

 

 

 

 

 방명록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주소와 이름, 그리고 간단히 한 줄 쓰는 게 있고, 백지에 나름대로 몇 줄 적는 데가 있습니다.

하도 여러 사람들이 써놔서, 나 또한 덧붙여 본대야 그게 그거겠다 싶기도 하고,

방명록에다 또 뭘 쓰겠다고 미리 생각한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냥 나오자니 서운하길래......

"반만년 역사 속에서 당신과 함께 했던 내가, 가장 자랑스러운 백성이 될 줄로 알았습니다."

여기까지 쓰고 났는데 막 눈물이 치솓는 겁니다.

내 바로 뒤에는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데, 눈물로 방명록을 흠뻑 적시게 생겼습니다.

앞이 안 보여서 글씨도 엉망이 돼버리고... 간신히 휘갈겨쓰고 도망나왔습니다.

"그런데, 당신을 이리 보내고나니, 나는 이제 가장 쪽팔리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다시 그때를 생각하면 또 눈물이 날려고 그럽니다.

 

 

  

 

 

 

 

 

 

  

이때 4시가 다 됐습니다.

5시 20분 기차를 예매해놨기때문에 둘러보고 어쩌고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서둘렀지요. 버스를 타자면 또 줄을 서얄 거 아닙니까.

 

 

 

 

 

 

 

 

 

이제 오는 사람들은 언제 돌아갈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조문객은 끝없이 이어집니다.

자원봉사하는 분께 물어봤더니 어제보다 적게 왔다는데도 이렇답니다. 

셔틀버스가 진영역, 진영 터미날, 진영 공설운동장, 김해공항, 이렇게 네 곳으로 운행을 하는데

기차로 온 사람이 젤 많은 것 같았습니다.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때의 사람들 표정이나 분위기는 비장했는데,
그런데 지금은 표정들이 좀 변했습니다. 개운해 하는 표정들이 많습니다.

발걸음에도 표가 납니다. 여기저기서 사진도 찍고 그럽니다.
한마디로 짐을 덜었단 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왜 그랬을까요? 조문 한번 했다고 비겁함이 덜어졌던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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