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나드 鹿野園 佛敎聖地

2009. 1. 22. 13:21북인도

 

  

 

 

정태혁이란 분이 쓴밀교의 세계』라는 책에 이런 대목이 있던데, 새겨들을만 합니다.

 

룸비니 지방은 표고도 꽤 높직하고 사계절이 뚜렷하나 서리나 눈이 오지 않고 농사짓기에 적당한 구릉지대다.

북쪽으로 히말라야의 높은 산이 있으므로 구름이 산마루에 부딪쳐서 비가 자주 오는 그런 기후조건이다.

이러한 평화스러운 농촌 풍경을 현장법사는 「풍속화창(風俗和暢)」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無常이라는 것도 이런 환경 속에서 경험하고 느껴서 알 수 있는 진리요,

극단에 떨어지는 과격한 행동을 하지 않고 中道를 걷는 사상도 여기에서 나오게 된다.

석존의 가르침도 이런 문화풍토에서 나오게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나 이슬람교가 발생한 이스라엘이나 아랍의, 작열하는 태양의 열사(熱沙) 밑에서

고기잡이하는  어부의 생활환경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일년에 6개월이나 비 한 방울 오지 않고, 타는 듯이 내리쬐는 불볕 더위 속에서는

「미워하는 神」「벌을 주는 神」을 믿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은혜를 주는 자연의 혜택을 입으면서 사랑을 받고 사는 백성에게는 神은 용서하고 포용하는 神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풍요로운 땅은 마치 어머니의 젖가슴 같고, 거기서 나오는 먹을 것들은 모두 고마운 것이니,

그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도 이러한 평화로운 식물성 문명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

이런 뜻에서 기독교나 이슬람교의 가르침이 동물성 문명이라고 말해지는 것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

 

 

 

 

 

 

 

 

먼저 얘기했던 <오토 릭샤>입니다.

티벳에서 온 승려들인데 성지순례왔더군요.

릭샤꾼이 돈을 더 달라는 모양입니다. 

 

 

 

 

 

 

마우리야 제국의 황제 아쇽카는 열성적인 불교 신자였으며

그는 부처의 행적을 기념하고 불교를 전파시키기 위해 여러 개의 기념주와 탑들을 세웠다.

불교를 승상하는 이 전통은 숭가 왕조의 왕들과 여러 왕조들에 의해 지켜졌으며

사르나드는 후나족(훈족)이 침략한 6세기 전까지 지성적 성소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1세기경 마흐무드 가즈니는 바나라스를 침략하였고

12세기경 쿠탑우딘아이박은 사르나드를 침공하여 도시를 황폐화 시키고 유물들을 불태우며

신상들을 부수어 먼지로 만들어 버렸다.

 

외국의 침략을 제외하고도 힌두교의 부흥과 함께 나타난 불교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

자연적 재난, 그리고 종파의 분열 등

이 모든 것들이 불교의 몰락과 그에 따른 사르나드에 대한 무관심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벵갈 왕 팔라와 스디라팔라, 바산트팔라 같은 경건한 추종자들이 때때로 이곳에 찾아와

사르나드의 옛 영광을 재현하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 부흥의 조짐들은 영국이 이 땅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볼 수 없어 졌으며

오늘날 불교는 소수 종교로 남아있다. 

 

이후 사르나드는 거대한 흙 층으로 덥혀 있다가

1793년 자갓 싱이 바나라스에 있는 건축 地區에 자재를 공급하려 땅을 파기 시작한 이후로

오랫동안 묻혀 있었던 사르나드는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여러 사람들이 이 지역을 마구잡이로 발굴하기 시작하였으며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귀중한 유물들이 골동품 수집가들에게 넘어가기 시작하였다.

40여 개가 넘는 조각상과 50-60수레 분량의 돌들이 영국 관리들이 의해

강 건너 편 바루나 다리를 보강하는데 쓰여졌다.

결국 1856년 인도 정부는 염료 경작인 이었던 페르구손에게서 이 부지를 사들여

1900년 관리인을 고용해 본격적으로 이곳을 보존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양의 유물들이 출토되었으며,

이것을 계기로 고고학 발굴이 시작되어 1907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리하여 인도를 여행 온 영국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1905 년 이곳에서 발굴된 많은 조각상들을 모아서 박물관이 지어졌다.   

                                                                                                                    

 - 어제 그 책에서-

 

 

 

 

 

 

오른쪽에 희미하게 보이는 건물은 자이나교 사원입니다.

자이나교는 불교완 비교도 안되게 계율이 엄격합니다.

 

 

 

 

 

 

 

 

 

 

다 헐리고 온전히 남아있는 것은 이거 하나뿐입니다.

<다메크 스투파>입니다.

'다메크'는 진리를 주관한다라는 뜻이고 스투파는 탑이란 뜻입니다.

안에는 그냥 텅 비어있는 겁니다. 

아쇼카 왕 때 지었답니다.

인도 불교 유적의 대부분은, 지금 이곳 녹야원도 마찬가집니다만 대부분 아쇼카 왕 때 만들었습니다.

아쇼카가 큰 물주였던 셈이지요.

원래는 아쇼카 왕도 석가모니처럼 힌두교도였답니다.

 

여기 녹야원,

주춧돌이나 건물 잔해, 남겨진 기록을 보면 규모가 대단했었던 모양입니다.

석존이 처음 설법을 한 장소라니까 어련했겠습니까?

그런데 이슬람이나 힌두 등의 이교도에 의해서 쑥대밭이 된 거지요.

아주 못 된 것들입니다.

 

 

 

 

 

 

 

 

 

 

 

 

 

일종의 탑돌이 하는 겁니다.

염불하며 도는 것도 아니고 뭐 대충 돕디다.

7 바퀴 돕니다.

바라나시 화장터에서도 화장할때 유족들이 7번 돌고 5번 절한다고 들었습니다.

 

 

 

 

 

 

누가 장난으로 두루말이 화장지를 던져넣은 줄 알았는데

목도리인 모양입니다.

저 티벳승 중의 한분이 철조망에 제 목도리를 벗어서 거는 걸 봤습니다.

자기가 왔다 갔다는 뜻도 되겠고 경배한다는 뜻도 되겠지요. 

 

 

  

 

  

 

어떻습니까? 영특해 보입니까? 성불하게들 생겼습니까?

축구나 족구 잘하게 생겼지요?

 

 

 

 

 

 

 

 

 

 

 

    

 

 

티벳 불교를 선전할려고 하는 건지.....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건지..... 

바닥도 찬데 굳이 여기와서 저렇게.....

 

 

 

 

 

 

" 에이그 안됐다__ .."

 

 

 

  

 

요 사진, 괜찮지요?

  

 

 

 

 

 

  

잠깐 이 친구 얘기 좀 하고 갑시다. 

9일간 안내를 맡아준 25살 청년 Saqib Khan입니다.

그 정도면 일처리도 잘하고 제 실속도 잘 챙기는 편입니다.

벌이한 돈은 일단 부모님께 갖다드린다더군요. 물론 미혼입니다.

투어가 없을 때엔 델리 외곽에 마련한 밭에서 농사 짓는답니다.

(인도는 농지를 빌려주면 경작하는 사람과 반반 나눈답니다.

 이번에 보니 유채를 많이 심더군요.) 

 

Khan이 금년엔가 내년엔가 한국에 온답니다.

서울대에서 경영자과정인가 이수하러 온다더군요. 

5,000명 중에서 달랑 2명만 선발하는 시험에 뽑혔답니다.

전액 장학금에 생활비 지원까지 받는다는군요. 

인도에선 우리나라 비자 받는 것만도 엄청 힘들다는데 한마디로 땡 잡은 것이지요. 

'델리 대학교'를 졸업했다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대 급이랍니다.

('네루 대학교'라고 아시아 최고 명문대가 또 있다더군요.)  

 

한국엔 와보지도 않았단 친구가 한국 관광객을 상대로 가이드를 하니깐 대단한 재간둥이죠.

한국어는 인도로 유학 간 우리  학생들한테 배웠답니다.

인도는 초등학교때 산스크리스트어를 배우는데 그게 한국말과 비슷한 구조라네요. 

그래서 한국어 배우기가  의외로 쉽답니다.

김치나 고추장, 우리나라 음식을 다 좋아하고 잘 먹는답니다. 

호텔에서 저하고 두 번 술을 마셨는데, 술을 제대로 배웠습디다.

일어나서 두 손으로 공손히 따르는 거예요. 

우리 아이들이 가서 제대루 갈쳤습니다. 

 

 

 

 

  

 

   

 

    

 

모든 관광을 마치고,

귀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인디라 간디' 공항으로 이동하는 버스 속에서

Khan이 종이 한 장을 돌리며 우리들에게 여행후 소감 한마디씩을 적어달라더라구요.

여태 여행하면서 그런 경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너도 한 줄 써달라 그랬지요.

 

내가 메모하며 다니던 수첩 뒷장에 쓴 것입니다.

발음도 저 글 쓰는 것과 같습니다. 

대충이야 알아듣지만 정확한 語意를 제대로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 이 여행기를 쓰면서도 일일이 다시 확인작업을 거쳐야하는게 난감합니다.)

 

호텔에서 다른 가이드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우리 Khan보다 발음이 훨씬 정확하더군요. 

인도는 가이드가 한국 사람이 없고 모두 인도 사람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높이가 100m나 되는 탑도 있었답니다.

보면 전부가 사암으로 만든 벽돌입니다.

그리고 여기 녹야원에는 보리수나무 / 반얀나무 / 림나무가 많은데

그 세 종류의 나무에 해꼬지했다간 경친답니다.

물론 여기서만 해당되는 얘깁니다만.

 

 

 

 

 

 

 

 

  

 

여긴 뭐였고 저긴 뭐였고, 설명을 듣긴 들었는데 통 기억이 나지 않습디다.

다 헐리고 아무 것도 남아 있는게 없으니 소용 없긴 합니다.

 

 

 

 

 

 

 

 

 

 

 

 

 

 

"참나, 저런걸 뭐하러 때려부시는지!"

 

 

 

 

 

 

밖으로 나가면 바로 맞은 편에 '사르나트 박물관'이 있습니다.

인도미술 최고의 걸작이라는 아쇼카 석주두(石柱頭-인도 화폐에 나옴)를 비롯해서

초전법륜불좌상 등 이 지방에서 출토된 쿠샨왕조 굽타왕조 시대의 불교조각상이 많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내부에선 사진을 일체 못 찍게 하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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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에는 이렇게 보인답니다.

 

 

 

 

 

 

 

 

불교의 4대 성지로 석가모니가 태어난 곳, 룸비니 / 석가모니가 득도한 곳, 부다가야 /

득도한 후 최초의 설법을 한 곳, 사르나드 / 석가모니가 입적한 곳, 쿠쉬나가라 / 를 꼽는데,

아무래도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가 제일 인기있는 성지겠지요.

4개 성지를 12년마다 한번씩 돌아가면서 큰 행사를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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