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5. 11:12ㆍ책 · 펌글 · 자료/문학
'결핍에서 출발 허무로 귀착하는 비극뿐인 자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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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은 말했다. 시인은 모든 면에서 백치가 될 수 있지만, 단 하나 시인을 발견하는 일에서만은 백치가 아니라고. 윤대녕의 소설 ‘천지간’은 죽음만이 죽음을 알아보는 세상 이치를 잘 보여준다. 병자의 눈에는 병자가 띄며,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슬픈 사연은, 마음에 슬픔을 간직한 사람만이 보는 법이다.
1939년 망명지 북유럽에서 브레히트(1898~1956)는 노래했다.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무엇보다도 / 어부들의 찢어진 어망이 눈에 띌 뿐이다. / 왜 나는 자꾸 / 40대의 소작인 처가 허리를 꼬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
이는 그가 세상의 슬픈 사연을 인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남의 수모를 자기 수모로 받아들이고, 또 사람들의 슬픔을 자기 슬픔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똑같은 바다이건만 어부와 유람객의 세계가 명암으로 나뉜다. 그는 가난한 어부의 찢어진 그물이 눈에 밟혀, 돛단배 위의 아름답고 축복받은 세계를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의 슬픔과 세상의 슬픔이 교호하는 가운데 문학은 태어난다.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 문사들의 비애는 우선 생활고에서 발생한다. 자고로 문인 학사의 생활고란 경제적인 궁핍은 물론이요, 자신의 능력이 대접받지 못한다는 심리적인 수모감 때문에 가중되는 법이다.
1786년 정월 박제가는 조선 사회를 뒤흔들 만한 장문의 개혁책을 정조에게 올리면서, 끝에 “특별히 하루 휴가에 말을 받아 쓸 사람 10명을 보내주면 폐부에 담긴 생각을 모두 쏟아낼 것” 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임금에게 사자관(寫字官) 10명을 보내달라고 요구할 만큼 36살 박제가의 흉중에는 조선의 100년 대계가 꽉 차있었다. 박제가는 그 이전이나 뒤나 규장각의 비정규직 말단 서기에 지나지 않았다. 서른 살 즈음에는 읊조렸다.
“앉아서 왕도 패도 손에 놓고 논하여도 / 당장에 소금과 쌀 갖추기도 어렵구나” (坐談王覇易, 立辦鹽米難)라고.
이상과 현실, 경륜과 처지 사이의 거리가 까마득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패기가 넘쳤다. 하지만 마흔 살 즈음이 되자 세상 이치가 눈에 보였고, 패기를 자극했던 그 거리는 비애감을 증폭시킬 뿐이었다.
(志士凄凉悲老大, 楚人搖落歎芳香.)
미국 망명 시절 브레히트도 글을 팔아 극심한 생활고의 일부를 해결하려고 했는데, 그 심정을 이렇게 노래했다. “아침마다 밥벌이를 위하여 / 거짓을 사주는 장터로 간다.” (‘헐리우드’, 1942)
끊임없이 문학으로 세상을 변혁시키고자 했던 브레히트도 굶주림 앞에서는 글을 써 들고 시장에서 값을 흥정해야만 했다.
프란츠 파농(1925~1961)은 “식민지 사회는 본질적으로 병적이고 신경증 사회이며, 이는 개인에게 그대로 전이된다”고 했다. ‘예기(禮記)’는 “망한 나라의 음악은 슬프면서 옛일을 떠올리니, 그 백성들이 괴롭기 때문”(亡國之音,哀以思, 其民困)이라고 말한다.
이들 말대로라면, 식민지 현실을 회피하지 않은 우리 문학은 본질적으로 병적이며 슬플 수밖에 없다.
망국의 망명자 신채호(1880~1936)는 백두산을 찾아가는 길에 이렇게 읊조렸다.
가난과 병 이어져 잠시 아니 떨어지네 / 그중 가장 한스러운 건 물과 산 다한 곳에서도 / 목 놓아 통곡하고 노래하지 못함일세.
(人生四十太支離, 貧病相隨暫不移. 最恨水窮山盡處, 任情歌哭亦難爲.) 신채호는 터져 나오는 비탄도 흘러내리는 피눈물도 도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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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근래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그 말에 담긴 끔찍한 비극을 뻔히 알면서도 오로지 자기 권력과 이익을 위해 좌익이니 빨갱이니 하는 말들을 교묘하게 내뱉는 사람들이다. 이보다 더 나를 슬프게 하는 건, 그런 사정도 모르면서 앵무새처럼 그 말들을 되풀이하는 사람들의 천진함이다.
세상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하지만 세상의 슬픈 사연은 슬픔을 간직한 사람만이 볼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의 슬픔과 세상의 슬픔이 교호하는 순간 문학은 깨어난다. 이웃의 슬픔을 보지 못한다면 공동체도 문학도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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