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 가는 길

2008. 6. 23. 13:30이런 저런 내 얘기들/네 얘기 · 쟤 얘기




 


 

 

 

 

우리 식구 모두 이사가면서
나는 고향의 큰댁에 맡겨졌는데,

그리고 얼마 지나
국민학교 오륙학년쯤 되던 어느날로 기억된다.

학교 운동장으로 나를 찾아오신 아버지를 따라 나섰는데
어디로 가는지를 물어보지도 않고
그저 오랜만에 본 아버지가 반갑고 좋아서
손잡고 걸으며 킁킁 냄새도 맡고
이것저것 학교얘기며 큰댁의 얘기며 정신없이 조잘거렸었다.

작은 가게에 들러 술 한병과 과자 몇가지를 사신 아버지는
산을 향해 걸음을 옮기셨는데
그 길은 우리가 추석때 사촌들과 장난치며
더위에 짜증도 내며 가던 산소 가는 길이었다.

그 산에는 고조부모님 부터 조부모님들까지
옹기종기 모여사는 작은 마을의 모습이었다고 지금도 기억된다.
앞이 트이고 뒤로는 병풍같이 산이 둘러쳐져 아늑하고
바람없이 햇살 좋은 그런 곳이었다.

추석에 온 집안식구들 모두 모여 족히 수십명은 됨직한 대식구가
제수거리를 이고지고 자리등속은 옆에 끼고
대이동을 하듯 신작로를 거쳐 산으로 오르는 오솔길을 향해 가면
동네 사람들이 구경이나 난 듯이 내다보곤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부러움의 눈길이었던것 같다.

평소와는 다른 조심스런 몸가짐으로
얼굴 가득 자애로움을 담은 어른들이 자리를 펴고 차례상 차림에 분주할때
나는 사촌들과 어울려 숨바꼭질과 봉분위에서의 미끄럼을 즐기곤 했고
"흠흠...그러는게 아니다... "
나직한 어른들의 나무람에 영문도 모른채
그저 경건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슬며시 놀이를 멈추곤 했다.

곧이어, "모두 모여라... "
큰아버지의 낮은 부르심에 다소곳이 모인 우리는
엎드려 절을 하면서도 사촌들과의 장난은 계속 이어져 캬들거리고
"흠흠.." 낮은 기침 소리의 주의를 듣고서야 열중할 수 있었다.
차례 끝나면 둘러앉아 송편을 먹으며 조상들의 토막얘기를 듣곤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얘기들의 주인공이 고조모님인지
증조모님인지 혼란스럽다.


그 날, 아버지와 나와 단둘의 산소행은 처음이었는데
확실치는 않으나
바람도 꽤나 심하게 불었고 흐렸던 초겨울 어느날이었던 것 같다.
추석에 사촌들과 함께 왔던 아늑한 산소의 풍경이 아니고
적막하고 을씨년스러웠다고 기억되는데
아마도 그 날 아버지의, 억눌림을 토해내는 신음과도 같았던
울음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다 큰 어른인 아버지가 그렇게 큰소리로 울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그리고 두려웠었다.
아버지의 들먹이는 등 뒤에서 배어나오던
외로움이나 그리움, 그리고 서러움의 깊이를 눈치챈
나의 조숙함 때문이었던것 같다.

담배 한 개피를 깊은 한숨처럼 토해내던 아버지는
산 속이라 일찍 찾아오는 어두움이 주위에 내려앉을 무렵
내 손을 잡기도, 비탈길에선 업기도 하고 내려왔었다.


어린딸의 손을 잡고 찾아간 어머니의 산소에서
목을 놓아 음울한 울음을 내뱉던 내 아버지의 서러움의 사연을
지금껏 들어본 적은 없으나
가끔씩 찾아오는 난해한 문제들 앞에서 도피하듯
몇 년전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산소를 찾아 목놓아 울게 만드는
내 일상을 비추어 볼 때 이해하기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듯하다.


어머니 모신 공원묘지에
소풍하듯 다니시며 온갖 꽃으로 가꾸시는 아버지는
오래 전 당신 어머니의 산소 앞에서 신음같이 뱉어내던 그 울음을,
지어미의 산소 앞에서 한숨처럼
먼저 보낸 회한과 통한의 쓸쓸한 울음으로 자책하시지나 않는지 모르겠다.

생자필멸, 회자정리라는데,
새삼 삶과 죽음, 이별, 이러한 사무친 기억들에서
놓여나게 될 날이 있을까 싶다...

 

 

 

 

 

 

< 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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