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 에서 글쓰기

2008. 5. 24. 12:02책 · 펌글 · 자료/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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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호가 깊은 산에 있으면 온갖 짐승들이 두려움에 떨지만,

함정에 빠지고 나면 꼬리를 흔들며 먹이를 달라고 합니다.  

… 이제 손발이 묶인 채 칼을 차고 맨몸에 매를 맞으며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옥리를 보면 땅에 머리를 조아리고 간수만 보아도 숨을 죽이게 마련입니다.
- 사마천이 감옥에 있는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의 일절이다.

 

일단 함정에 빠지고 나면 맹호도 고기 한 점에 꼬리를 흔들고,

제 아무리 지조 반듯하던 선비라도 옥리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

철창 안에 갇히는 순간 자유는 저당 잡히고 인격은 무시된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무릎을 꺾게 된다.

숲의 제왕인 맹호도 그러할진대 토끼나 노루야 더 말할 것이 없다.

위협과 모욕과 지탄 속에 사람들은 공포와 수치심과 자학에 빠지고, 이는 무력감으로 이어진다.

물리적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곳이 감옥인 것이다.

여기에는 절망과 슬픔만이 가득하다.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한 사형수가 형장을 향해 아리랑고개를 오르며 부른 노래가 ‘아리랑’이고,

이후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이 노래를 불렀다는 김산(1905~1938)의 이야기는

감옥에 얽힌 민중들의 슬픔을 절절하게 전해준다.


그들은 그 상황에서도 노래를 부르며 자신들의 절망을 끌어안고 따스하게 슬픔을 보듬으려 했던 것이다.

‘아리랑’이 죽음의 노래이지만,

죽음이 패배는 아니며, 수많은 죽음 가운데서 승리가 태어날 수 있다고 하여,

김산은 민중들의 끈질긴 생명력에 대한 애틋하고 두터운 신뢰를 보여주었다.

 

‘아리랑’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조로 꼽힌 것은,

거기에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이 배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노래들은 절망적인 유폐의 상황에서 포착된 진실이

어떻게 생명의 언어로 되살아나는가를 말해준다.

  


간첩으로 몰려 1971년부터 88년까지 옥살이를 했던 서준식

옥중에서 쓰는 글이 맑고 치열하고 깊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본시 수인이란 남을 짓밟으려야 짓밟을 수도 없는 가장 밑바닥에 놓인,

 따라서 세상에서 가장 부끄러움 없는 사람이기 때문” (‘옥중서한’)이라고 했다.

 

감옥에서 나온 글은 때로 너무 순결하여 책장을 넘기면 활자가 깨어질까 두렵다.
1919년 3·1운동을 주도한 죄목으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한용운

변호사를 대지 말고, 사식을 들이지 말며,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다음은 그가 수감 중 지은 여러 편의 시 중‘설야’(雪夜)이다.

사방 산 옥 에우고 눈은 바다 같은데 /

이불 차갑기 쇠와 같고 꿈은 재가 되었네 /

철창도 가둬두지 못하는 것 있으니 /

한밤중 종소리는 어디서 오는 건가.

(四山圍獄雪如海, 衾寒如鐵夢如灰. 鐵窓猶有鎖不得, 夜聞鐘聲何處來.)

계절은 겨울이고 시간은 새카만 밤이다.

몸만 추운 것이 아니라 꿈도 재처럼 식을 만큼 절망의 상황이다.

그런 가운데 철창을 뚫고 은은히 들려오는 것이 있으니 바로 산사의 종소리이다.

안을 쳐서 밖으로 소리를 내는 종소리는, 산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이다.

종소리는 밤을 거둬가고 꿈의 불씨를 살릴 것이다.

그야말로 두드릴수록 단단해지는 쇠와 같은 지사의 시라 할 만하다.

 

감옥은 진짜 삶의 학교가 되기도 한다.

 

함석헌(1901~1989)은 평생 여섯 차례나 투옥되었는데,

감옥은 생각하는 곳이기에 밧줄과 고랑과 철창으로 된 대학이라고 했다.

그는 이 독특한 대학을 경험하며 숱한 글을 지었다.

주로 역사와 사상에 대한 그 글들이 문학작품 이상의 감동을 주는 것은

그의 가슴에 언제나 뜨거운 시심(詩心)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하지 못하는 사람은 복종할 수 없다.

자유를 알기 전에 한 복종은 짐승의 길듦이지 인격의 순종이 아니다”

얼마나 시적인가!

 


루이제 린저(1911~2002)는 나치 독일 말기인 1944~45년 반국가주의자로 감옥생활을 하였다.

그녀는 비인간적인 처우를 견뎌내며 몰래 일기를 써서 감추었다.

뒷날 그녀는 어두운 과거는 그냥 조용히 내버려둬야 한다는 생각에

이 옥중일기의 출간을 결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기차 여행 도중 사람들과 우연히 히틀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20년도 안 지난 그 잔혹한 역사를 이미 잊고 있거나 거기에 무관심했으며,

심지어 히틀러를 옹호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출간을 결심했고, 

 

... 과거로부터 분리되어 독립된 미래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라는 것이 도대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과거란 현재 속에 그대로 담겨 있는 것이며, 현재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악의 범죄를 은폐하고 기억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향해,

‘아름다운 영혼의 세계’로만 도피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며,

인간의 기억으로부터 억지로 추방된 것은 언젠가는 다시 강한 힘을 가지고 새로 나타난다'고 경고했다.

세상에 과거가 어디 있는가?

모든 과거는 다 현재에 들어있으며, 미래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유일한 이정표이다.

 

 


리는 모두 이념과 도덕과 논리의 포승에 묶여있고 언어와 관념과 아집의 벽에 갇혀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이들의 눈에는 불현듯 보이지 않던 벽이 나타날 때가 있다.

유폐를 자각하는 것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겹의 높고 튼튼한 벽을 감지하는 것이다.

그때부터 담장 밖의 세계를 상상하고 교신을 시도하고 탈출을 계획한다.

감옥은 가시적인 유폐의 장소일 뿐이다.

상상은 나를 가둬두는 힘에 대한 반작용인 것이다.

옥창 밖의 새들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벽을 감지하고 그 밖의 세계를 상상할 때 문학은 잉태된다.

보이지 않는 유폐의 벽을 끊임없이 감지하고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 문학의 책임이다.

문학은 끝내 자기가 해방되어서는 아니 된다.

천형처럼 언제까지나 유폐의 실상을 감지해야 한다.

문학이 먼저 해방되어 더 이상 유폐를 감지하지 못한다면,

그 세상에 희망이란 없는 것이다.

 


<이승수 | 경희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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