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버지 산소

2007. 12. 27. 08:45이런 저런 내 얘기들/내 얘기.. 하나

 

 

  

 

 

 

 

인제에서 자동차로 5분 정도 가면 원통인데,

그 원통 다다를 즈음해서 좌측편으로 올라가면

양구로 넘어가는 길, '광치령'이다.

이제는 서울사람들에게도 꽤 알려져 있을 터, 

몇해 전에 터널을 뚫은 이후로는 통행량도 제법 된다.

 

옛날엔 넘어다니기가 힘들었다.

가파른데다 비포장의 좁은 도로라서 

차 두대가 만나면 한대는 널찍한 곳을 찾아 정차해 주어야 했다.

눈이 조금만 와도 두절이고, 여름에도 빈번한 산사태 때문에......

하루에 두번 운행하는 버스를

기다리기보단 걸어서 넘는 사람이 많았다.     

   

사진에 보이는 것 처럼  행정상 지명은 '가아리'다.

내 어릴땐 '개미니'란 말을 많이 들었는데 같은 지명인가 모르겠다. 

조선말경쯤에 화전민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으라 짐작이 되는데,

동네랄 것도 없이 골짜기에 한두 집씩, 드문드문 살았단다.

아버지가 소학교를 나오셨단 걸 보면 그래도 수백 가호는 되었던 모양. 

 

아래 보이는 것이 광치령 터널이다.

완공된 것은 아마 5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터널이 생기기 전에는 사진 우측으로 아주 산 꼭대기에 길이 나있었는데,

지금도 林道로 쓰이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부터가 내 얘기의 시작이다

지금 저 터널의 사진은 양구방향에서 찍은 것인데,

저기엔 길도 없고 맨 숲이다.

인제쪽 터널 입구라야 동네도 보이고 드넓은 고냉지 채소밭도 보인다.

물론 입산로도 그쪽이다. 시멘트 포장이 잘 되어있다. 

터널 바로 위, 10시 방향에 내게로 증조부와 큰아버지 산소가 있다.

 

 

 

 

 

 

 

성묘를 가면 늘 양구서 농사짓고 사시는 큰형님이나 큰집 조카들과 동행을 하는데,

언젠가 한번은 아버지와 나, 그렇게 둘이서만 들려온 적이 있다.

그때 아버지랑 산소 앞에 앉아서 풍수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에 

 

"여기 빙 둘러보면 경치가 참 멋지단 생각이 들어요."

 

"처음 자리 잡을 때 인제사람들도 다 명당터라 그랬지.

우리 형편에 이런 자리 난 게 신퉁하다"

 

"근데 청룡등 보다는 백호등이 틈실하네요.

그리고 아랫 봉우리가 툭 불거진 걸 보면 큰집 보다 우리쪽으로 더 좋아 뵈는데,

혹시 자리 잡으실 때 그런 생각은 안하셨어요?"

   

"그런 소리 마라. 저만하면 위 아래 모두 흠 잡을만한 데가 없다. 

자리 구하러 다닐때, 손톱만큼도 그딴 생각을 품은 적이 없었을 뿐더러

만일 그런 일이 있었다면 당연히 나는 너희들보다 형님네 애들에게 좋다는 쪽으로 골랐을 게다. 

그리고  이참에 아들인 네게도 분명 말해두지만, 

이것이 솔직한 내 생각이고 형님도 생각이 나와 틀림없이 똑같았을 게다." 

 

아버진 늘 나와 함께 여행다니시길 좋아하신다.

의심할 여지 없이 진심에서 나온 말씀이다.

  

 

(사진. 흰색 옷을 입으신 분이 아버지고, 큰집 둘째 형님과 장조카다.)   

 

 

 

 

 

  

 

내 알기로 큰집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 건 내 바로 위, 한 살 많은 형 부터다.

인천에서 뭔 큰 가구 공장에 다니던 중에 변사체로 발견됐다는 거다.

당시에는 노조활동만 했다는데 노조 부위원장이었단다. 

 

말이 형이지 나와는 친구처럼 지냈던 형이다.

그 형은 어려서부터 늘 病을 달고 살아서 결국에는 중학교도 제대로 못 마치고

훗날 검정고시로 중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야간대학까지 마쳤다.

 

큰집 형제들이 다 그렇지만 사회 적응력과 자신감이 넘쳐났다.

언변도 출중한데다 자기 신념이 분명해서 어딜 가도 참지 못하고 입바른 소리를  잘했는데

명절때 더러 큰집엘 가서 만나보면 늘 정치나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그런 주제를 놓고 나와 토론하길 좋아했다.

 

체구는 작고 깡말랐지만 강단이 보통 센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형이 변사체로 발견되었다고 부고가 날아온 거였다. 

세달인가 지나서 발견된 시신을 부검하고, 화장하고,

5살 나던 아이는 제 외갓집에 맡기고...

 

큰아버지와 큰어머님께는 얘기를 안한 걸로 알고있는데,

정말 끝내 모르셨는지...

 

   

  

아래쪽 산소가 큰아버지 묘다. 76세때 동네어귀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운동회 다녀오시다가......

 

내 아버지도 그렇지만 큰아버지도 회를 무척 좋아하셨다는데

그래서 닭도 잡으면  날 거로 드셨단다.

털만 벗기곤 뼈ㅅ채 기름소금에 찍어서 한마리를 다 잡쉈단다.

 

아버진 큰아버지 앞에서 맞담배질을 못하셨다. 늘 말씀으로만,  

"형님, 저도 이제 나이 50인데 형님 앞에서 담배 태워도 되겠지요?"

"형님, 저도 이제 애들 시집 장가보낸 마당인데 담배는 마주 앉아 태우겠습니다."

"형님, 저도 환갑이 넘었습니다. 담배 좀 태워야겠습니다."

 

말씀만 그리하셨을 뿐, 늘 밖에 나가서 피우고 들어오셨다. 

 

    

 

장례를 치루는 내내 부슬부슬 비가 왔는데,

특히  전날엔 엄청 쏟아부었었다. 

그래서 산역(山役)을 하는 사람들에게 비닐을 잘 덮어놓으라고 신신당부를 해두었는데

막상 가보니까 달랑 묘자리만 덮어놓은 거다.

그러니 어제 그 많은 비가 다 스며들었을 것이 아닌가.

퍼내도 퍼내도.... 속수무책인데,

참말로 기가 막히고, 화도 나고....  

(솔직히 내 아버지 같으면 장례를 미루더라도 그리 모시진 않았을게다.)

 

아무튼 산역을 마치고 내려와서 돌아갈 모든 채비를 끝내고

아버지 내려오실 때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뒤늦게 내려오신 아버지로 부터 결국 한마디 듣고야 말았다.

“이제 너희가 뭔 급한 볼일이 남았다고,

또 형님이 생전에 너희에게 뭔 서운한 일을 하셨다고,

어찌 하나같이 그렇게 서둘러 내뺄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날 아버진 여러모로 속상해서 술도 많이 드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큰집 형제들 순서는 이렇다.

젤 위로 양구 읍내에 사시는 누님, 

큰형님,

포항 사는 형님,

그리고 죽었다는 형,

한 두살 아래 여동생,

그리고 죽은 형과 단짝을 이루던 인천 사는 막내동생.

 

(큰 형님은 아들만 4,

작은 형님이 딸만 3인데, 참 묘하다.)

 

명절때 큰집엘 가면 늘 큰 매형 얘기가,

큰형님네집에서 전화만 왔다 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소식뿐이란다.

아닌게 아니라 그렇게 꽤나 크고 작은 사고가 줄을 이었는데....  

 

우선 큰형님부터가 문제다.

툭하면 예고도 없이 집을 나가서는 몇년씩 있다가 들어오는 거다.

(큰형님 얘기를 하자면 너무 길어진다. 다른 기회에 하기로 하고.)

그러다보니 적지 않은 농사일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셋째 조카가 도맡아서 지어야 했는데,

내 아버지인 작은 할아버지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대견해 하며 사기를 북돋워주었을 건 자명한 이치.

헌데 이 놈이 어느 순간 부터 우쭐해서는 제 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하는 거다.

 

큰 기종의 오토바이를 거의 매년 바꾸다시피 하더니 

결국 오토바이 사고로 한쪽 눈을 실명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나중에 포항 형님네 결혼식장에서 만났는데, 아 글쎄 스포츠카를 몰고온 거였다.

아니 세상에 시골서 농사짓는 새끼가! 

어른들 모르게 소 몇 마리 내다 팔았단다. 

결국 그놈 새끼, 원주 인근의 중앙고속도로에서 트럭 뒤를 들이받고 죽고 말았다.

 

 

이번에 만난 여동생 얘기가

"오빠, 난 꿈이 거의 들어맞거든?

근데 전에 아버지 돌아가시고나서 계속 꿈을 꿨는데, 아버지가 나타나서는

'여기는 내 자리가 아니야, 여기는 내 자리가 아니야'.

 

(이런 얘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큰집 형제들 간에 있어왔고,

화장을 하느니 어쩌느니 하다가

큰어머님 돌아가시면 그때 할머니 할아버지 묘 옆자리로 이장하는 걸로 낙착이 됐었다.)

 

그런데 사실 나 역시도 찜찜하긴 마찬가지였는데, 

내가 염려한 바는 산소 바로 뒤로 뚫은 터널때문이었다.

터널이 완공된 것은 불과 5년 밖에 안되지만 그 공사를 시작한 건 근 20년 가까이 된다.

아버진 터널이 땅 거죽에서 깊기 때문에 별 상관이 없을 거라곤 하셨지만

난 그 점이 늘 맘에 걸렸다.

아버지나 나나 지하 얼마의 깊이까지가 龍脈일지는 아는 바 없지.

 

 

 

 

 

 

 

 

 

큰집 막내 동생은 꽤나 까불면서 크더니, 결혼해서까지도 까불다가 결국 이혼했다.

사연을 물어도 대답을 안해주는 걸로 봐서 원인이 100프로 저한테 있단 얘기다.

근데 이 녀석이 여자 후리는 재주는 타고났다.

내가 추석때면 두 해 걸러 한번씩 큰집엘 가는데

갈 때마다 새로운 여자를 하나씩 달고 오는 것이다.

우리 작은집 식구들한테는 내놓고 인사를 시키지않아서 어떤 여자들인지는 모른다.

이번 큰어머님 장례때도 한 사람을 데려왔는데, 저 보다 두살 위란다.   

상복을 입고, 장례식장일 다 거들고, 

산소까지 따라와서 그 추운 날씨에 우리와 똑같이 죽게 고생했다.

참으로 안됐단 생각이 들면서도 

그동안 동생놈 한 짓을 생각하니 그 여자 헛고생하는 것 같아 웃음이 나오더라.

 

  

 

 

 

여동생 내외는 딸만 둘인데, 내외가 情도 깊고  친정인 큰집에도 잘했다.

큰형님이 깔끔하기도 하셨지만 여동생의 공로도 무시 못한다.

그리고 매제가 사람이 똑똑해서 큰집의 온갖 궂은 일이란 궂은 일은 무능한 큰형님을 대신해서

다 나서서 해결했다. 심지어 벌초 때도 한번 빠짐없이 그 매제가 와서 함께 다 했다.

 

그런데 이혼을 했단다.

첨엔 쉬쉬해서 몰랐는데 계속 매제가 안 뵈길래 물어보니 그렇게 됐단다.

그동안 처갓집일을 내 일보다 더 열심히 거들었던 사람인데,

이제 내외가 남남이 되었으니... 나와도 남남이 된 것이다.

참말로 인척관계란 것이..... 허망하다. 

내 아버지께서도 꽤나 이뻐하고, 의지하고, 얘기가 통했던 사위였는데...... 

이젠 벌초때도 안 온다. 그래서 지난 추석때 내가 가서 벌초했다.

(참고로 나는 처갓집 벌초 안 한다.)

 

 

 

   

 

 

   

 

그런데 큰집에서는 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을 뭉뚱거려 산소 탓을 하는 모양인데,

어떻게 동의할 수가 있나.

물론 인과관계를 확대 적용하자고 들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촌놈이 스포츠카 타고 다니다 사고를 당하는 일이 어떻게 조상탓이겠냐?

그런 식이라면  조상탓 아닌 게 뭐 있냐? 

다행히 장손이 늦게 결혼했는데, 의외로 며느리가 아주 잘 들어왔다.

얼마 전에 아들을 낳았는데 한 달 뒤면 백일이다.

지금의 큰집 형편과 조카의 전력을 두루 감안해 보면 과분한 며느리다.

 

 

  

 

 

 

  

 

부모는 죽는 날까지 자식 걱정만 하다 가는 거라는데,

그것은 죽는 날 까지 만이고, 죽은 후엔 별개란 얘긴가?